1936년 2월 12일 경성에서 “조선 금광업 개발의 촉진과 금의 증가를 도모함, 조합원의 기술적 지도, 교양, 친목을 도모함” 등을 목적으로 창립된 광업 자본가 단체 조선산금조합(朝鮮産金組合)의 주1로 6월 10일 창간되었다. 조선산금조합 조합장 박용운(朴龍雲)이 편집 겸 발행인이었다. 박용운은 당시 최창학(崔昌學), 방응모(方應模)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광업 자본가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창간사에서 ‘광산 기업의 합리화, 산금 능률의 고도화, 참신 기술의 보급화’를 위한 ‘지도적 등대’가 되겠다고 밝혔다. 창간호는 A5판 72쪽으로 나왔으며, 정가는 30전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광업 정책 소개, 기술 교류, 금융 정보 등에 관한 논설과 기사가 많이 실렸다. 조선총독부 광산과의 주요 인물들도 필진으로 참여해 일제가 내세운 ‘산금 보국’론을 설파하는 통로로 활용하였다. 특히 중 · 주2 이후의 전시체제기에는 “현하 전시하 광업이란 국책으로 하는 국가적 사업인 까닭으로 해서 개인 영리만을 생각하는 광업가는 견디지 못하게 되”[제4권 제6호]었다는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창간 당시부터 강조한 ‘교양’의 일환으로 문학 작품을 빈번하게 수록하였다. 노래 가사 1편, 민요 1편, 시 1편, 만담 1편, 수필 1편, 실화 7편, 주3 22편, 소설 30편[단편 28편, 중편 1편, 장편 1편]이 확인된다. 30편의 소설 가운데는 김남천, 김유정, 이기영, 이무영, 이효석, 함대훈 등의 작품도 들어 있다.
1937년 5월 1일자 제2권 5호까지는 발행처가 조선산금조합, 편집 겸 발행인이 박용운이었지만, 같은 해 8월 1일자 제2권 제6호에는 발행처가 광업조선사(鑛業朝鮮社), 편집 겸 발행인이 이종만(李鍾萬)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 경영권이 박용운에서 1937년 6월에 출범한 대동(大同)광업주식회사 사장 이종만에게 넘어갔다. 이어 같은 해 12월 1일자 제2권 제10호부터는 발행처가 다시 광업조선사에서 이종만이 대동광업주식회사 창립 직후 세운 주식회사 대동출판사로 바뀌었다. 이후 대동출판사에서 1941년 2월 5일 제6권 제2호까지 발간한 것이 확인된다.
1941년 9월 1일자 『삼천리』 제13권 제9호에 “대동출판사에서 발간하던 『광업조선』과 『농업조선(農業朝鮮)』은 사정에 의해 폐간하기로 되었으며 그 대신 『조선산업(朝鮮産業)』이란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한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1941년 8월까지 발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광업조선』의 후신인 『조선산업』의 발간 여부도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국립중앙도서관 귀중 서고, 연세대학교 국학 자료실, 고려대학교 귀중 서고 등에 원본이 분산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광산 전문 잡지이지만 일제의 국책, 곧 조선총독부 산금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창간된 어용 잡지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