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곡물무역에 근무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외국어학교 러시아과에 입학, 1931년에 졸업했다. 재학 중 유학생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에 참여했으며, 『해외문학』·『문예월간』 등 문학잡지와 『동아일보』에 번역 작품과 연극평론의 글을 발표했다. 이 시기 연극계 활동도 시작했다. 1931년 귀국하여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러시아문학을 번역, 소개에 힘썼다.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학예부·출판부 기자로 활동했으며, 1937년 편집주임을 맡았다. 1938년 3월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당하자 극연좌를 조직하여 연극활동을 계속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간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시국강연대 일원으로 문예보국강연회에서 강연했다. 1940년 조선일보사 출판부 주임으로 친일종합문예지 『조광』의 편집업무를 담당했다.
1941년 친일 연극단체 현대극장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민연극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극개론을 강의하는 한편 기획위원 및 연구소장을 맡았다. 이를 바탕으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국민연극의 첫 봉화」, 「근대극과 국민연극」, 「국민연극의 전향」, 「국민연극의 건설」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일제의 신체제를 미화하는 「북풍의 정열」을 발표했다. 해방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안국장과 공보국장으로 활동했다. 1947년 소설 「청춘보」, 1948년 「희망의 계절」 등을 발표했다. 1947년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 재직 중 1949년 3월 21일 사망했다.
함대훈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91∼11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