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광산업자이자 친일 기업인이다. 1920년대,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군(현, 구성시)에서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여 삼성 금광을 열고 광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광산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광구를 보유하였다. 이것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미쓰이〔三井〕 광산, 일본 광업 등에 매각하여 큰 부를 일구었다. 조선의 금광왕, 광산왕, 천만장자는 그를 일컫는 수식어였다. 그의 성공 배경에는 친일의 그림자도 드러워져 있다.
1891년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현, 구성시)에서 태어났다. 주1에서 한문을 배웠고, 1906년부터 대동학교와 향산학교를 다닌 후 1912년 사립 진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0년 이상 금광을 찾아다녔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본인의 고향인 구성군에서 양질의 금맥을 발견하였고, 1922년 삼성(三成) 금광을 열었다.
삼성 금광은 연간 100만 엔의 생산을 올릴 정도로 실적이 좋아서, 최창학이 이후 ‘조선의 금광왕’으로 불리며 조선을 대표하는 광산업자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광산업은 날로 번창하여, 1920년대 말에는 평안도 일원을 중심으로 100개가 넘는 주2를 보유하였다. 1929년에는 삼성 금광을 일본 광산 대기업 미쓰이〔三井〕 광산 주식회사에 150만 엔의 거금을 받고 매각하였다. 그리고 이 자금으로 새로운 광산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사업 영역도 넓혔다. 1934년 경성에 광업은 물론 무역, 금융업을 목적으로 하는 대창 산업(大昌産業)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그 결과물이다. 100만 엔의 자본금에 75만 엔을 추가한, 당시 조선에서도 큰 규모의 회사였다. 1938년에는 다시 본인 소유 광산 중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 초산군(楚山郡), 삭주군(朔州郡), 구성군의 4개 지역에 있는 70여 개의 금광 광구를 관련 설비와 인력까지 포함하여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650만 엔에 매각하였다. 이런 규모의 대규모 매각은 조선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때부터 ‘광산왕’, ‘금광왕’, ‘천만장자’는 최창학을 일컫는 당연한 수식어가 되었다. 1941년에 이르러 최창학은 본인이 경영하는 주력 기업 대창 산업 외에도 조선 신탁, 다사도(多獅島) 철도, 경성 방직, 북선(北鮮) 제지 화학 공업, 매일신보사, 중신(中信) 위탁 회사, 경인(京仁) 기업 등 총 7개 기업에 이사, 또는 대주주로 관여하는 조선 굴지의 기업인으로 성장하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인 최창학이 이러한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스스로의 노력 외에 친일의 그림자도 짙게 드러워 있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일제 관공서나 공공사업에 대한 기부 수준이었지만,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친일기업가의 모습은 보다 뚜렷해졌다. 중일 주3이 발발한 1937년 평안북도 주4 도의원,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이사, 1939년 경성부 육군병 지원자 후원회 이사, 태평양 주5 발발 이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이사 등이 그가 맡은 직함이었다. 그 외에도 군용기 등 군수물자 제작비 헌납, 시국 운동비, 의연금, 방호비 등 각종 명목의 헌납이 이어졌다.
해방 후 기업 활동은 위축되었다. 두 가지 배경이 작용했는데, 하나는 남북 주6이다. 평안도 광산을 토대로 성장한 그에게 있어 남북 분단은 기반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하나는 정치 · 사회적 문제였다. 해방 후 사회적 지탄 속에서 친일 혐의에 대한 반민 주7의 조사 등을 받아야 했고 이는 곧 기업 활동 제약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일본인 소유 광산의 처리를 위한 ‘조선 광업 중앙 관리 위원회’ 설립 등에 참여했으나 일제시기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다. 김구에게 서울 경교장(京橋莊)을 사용하도록 제공한 것도 김구 암살 이후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1959년 그가 심장 마비로 사망했을 때, 언론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금광왕으로 명성을 떨쳤었다.”라는 과거형으로 그를 정의했다. 이때 언급된 그의 직함은 광산이나 그가 일제 시기 경영하던 기업들과는과 전혀 관련이 없는 오산(五山) 중 · 고등학교 이사장이었다. 독립운동가 이승훈(李昇薰)이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한 주8의 후신으로, 일제 시기 그가 동향 학교에 기부한 인연으로 사망 2년 전인 1957년 이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