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구 ()

산업
인물
1973년 삼성전자에 상무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삼성그룹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한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7년
사망 연도
2017년
출생지
경북 영주
주요 저서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고려원, 1996.
주요 경력
삼성전자 사장, 회장
대표 상훈
금탑산업훈장, 정보통신대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강진구는 1973년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시작하여 2000년까지 삼성그룹 전문 경영인으로 활약한 기업인이다. 삼성그룹의 전자·전기 분야 3사(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전관)의 최고 경영자로 뛰어난 업적을 내었다. 특히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자 업계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를 맡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울러 한국전자공업진흥 회장, 전자산업진흥 회장, 전자부품 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의
1973년 삼성전자에 상무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삼성그룹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한 기업인.
인적사항

강진구는 1927년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태어났고, 1948년 서울대학교 공대에 입학해 전기통신공학을 전공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포병 부대 통역 장교로 임관, 5년간 복무하였다. 이때 미군 장교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어에 능통하게 된다. 전역 후 첫 직장은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이었던 대한방송(DBC)이었다. 이후 미8군 방송국인 AFKN 기술 담당, 1962년 KBS 기술과를 거쳐, 1963년 새로 개국한 동양방송(TBC)의 기술 부장으로 입사하였다. 동양방송 입사는 삼성그룹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강진구는 동양방송 기술 부장 시절, 그간의 축적된 경험을 살려 방송 송출 설비 등 기자재를 자체 제작하는 등의 수완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눈에 띄어 1973년 삼성전자 상무 주1로 들어갔고, 1974년 대표 이사 사장이 되었다. 이후 설립 후 적자가 지속되던 삼성전자를 단기간에 흑자로 전환하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00년 삼성전기 회장을 마지막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20여 년간 삼성그룹 전문 경영인으로 활약하였다.

주요 활동

강진구가 1973년 상무 이사로 삼성전자에 들어갔을 당시 가전 업계는 금성사(현, LG전자)가 업계 선두였고, 대한전선(나중에 대우그룹에 매각)과 삼성전자가 뒤를 따르는 구도였다. 그러나 그가 1974년 대표 이사를 맡은 이후 삼성전자는 국내 기술로 만든 첫 컬러 TV인 이코노 컬러 TV 출시, 전자레인지 · 주7의 국내 최초 개발과 수출 등을 통해 금성사를 제치고 가전 업계 1위로 올라선다.

강진구는 1980년대에는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였다. 1982년에는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되어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150명의 우수 사원으로 신규 사업팀을 조직하여,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많은 수요를 가진 64K 주2의 개발에 몰두했고, 1년 만인 1983년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 개발이었다. 주3를 몰아 1984년 256K 주4 개발, 1986년 1M D램, 1988년 4M D램, 1989년 16M D램, 그리고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여 기존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따라잡았음은 물론 이를 능가하는 데 성공하였다. 1988년 삼성반도체가 삼성전자에 통합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199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까지 승진해 삼성그룹의 전자 · 전기 분야 3사(삼성전자 · 삼성전기 · 삼성전관)를 지휘했다. 1990년대에는 삼성전자 대표 이사 회장으로 휴대 전화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주6와 미국과 유럽이 장악한 주5로 의견이 갈릴 때 기술 자립을 도모할 수 있는 CDMA로 방향을 잡아 지금의 삼성 스마트폰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업적과 평가

강진구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자 업계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를 가전, 반도체, 휴대 전화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특히 오늘날 메모리 반도체와 휴대 전화에서 세계 최대의 생산 기업인 삼성전자를 만드는데 초석을 다진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강진구는 삼성그룹의 전기전자 사업 부분의 전문 경영인이었지만, 한국 전자산업의 얼굴로도 활동하였다. 한국전자공업진흥 회장, 전자산업진흥 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했다.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되었다. 금탑 산업 훈장, 정보 통신 대상, 장영실 과학 문화상, 벨기에 그랑그로스 왕관 훈장, 포르투갈 산업 보국 훈장 등 그의 공적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진구,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고려원, 1996)

논문

姜晋求, 「우리나라 電子製品開發의 現況과 方向」 (『경영학연구』 8, 한국경영학회, 1979)

인터넷 자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https://newslibrary.naver.com)

기타 자료

나권일, 「 [삶과 추억] 고 강진구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오늘의 삼성전자 터 다진 한국 전자산업계의 ‘큰 별’ 지다」 (『월간중앙』 10호, 2017).
주석
주1

재단이나 회사 따위의 이사 가운데 보통의 업무를 집행하는 기관. 또는 그 사람. 우리말샘

주2

0과 1의 비트를 집적 회로 안에 각기 분리된 축전지에 담긴 전하량에 의해 기록하는 64케이(K) 비트 용량의 동적 램으로 8,000자 정도를 기억시킬 수 있는 규모의 초고밀도 집적 회로. 우리말샘

주3

어떤 일을 겪은 다음의 나머지 세력이나 기세. 우리말샘

주4

256킬로비트(Kb) 용량의 동적 랜덤 접근 기억 장치. 4.04mm×12.98mm의 작은 칩(chip) 위에 너비 2μ으로 총 90만 개의 소자를 연결하여 32,000자의 문자를 기억하고 판독하는 초대규모집적회로이다. 단 한 개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 수 있고, 각종 대형 컴퓨터, 통신 기기, 사무 자동화 기기 따위의 대용량 기억 장치에 사용하는 첨단 반도체로, 제조 과정에서 μ 단위의 정밀도가 요구되므로 한국, 미국, 일본 따위의 일부 기업에서만 양산할 수 있다. 우리말샘

주5

하나의 통신선을 여러 국이 공유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시분할 기술을 사용하는 접속. 이것 외에도 하나의 통신선을 여러 국이 공유하는 방법으로는 주파수 분할 접속과 부호 분할 접속이 있다. 우리말샘

주6

디지털 이동 통신 방식의 하나. 디지털 신호 각각에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채널로 내보낸 다음 이를 받아 코드별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우리말샘

주7

비디오테이프에 영상 신호를 녹화하여 재생할 수 있는 장치. 음향 신호도 동시에 기록된다. 우리말샘

주8

디지털 이동 통신 방식의 하나. 디지털 신호 각각에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채널로 내보낸 다음 이를 받아 코드별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배석만(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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