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교섭국장(交涉局長)을 역임한 김익승(金益昇)이다. 호적등본에는 본명이 김제식(金悌植)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생 명부에는 김몌례(金袂禮)로 적혀 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제출한 자료에는 Mary Chesik Kim, Mary C. Kim 등의 이름을 썼다.
배화여학교에서 4년 동안 공부하였으나, 3·1운동으로 인해 졸업하지는 못하였다.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전공은 영어였다. 193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3년 미시간대학에서 음악과 피아노 전공 학사 학위, 1934년에 역시 미시간대학에서 음악과 음악 이론 전공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 9월 미국에서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취임하였고, 1936년에는 학과장을 맡았다. 1935년 2월에는 본인이 작곡한 「자장가, 너 어디 있는가」를 포함한 10곡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다. 1936년에는 본인이 작사 · 작곡한 동요 「새해 노래」를 발표하였다. 1939년에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 창작 발표 대음악제에서 「너 어디로」, 「발자취」 등 가곡 2곡과 피아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운동(國民精神總動員運動)의 일환으로 조직된 경성음악협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1941년에는 조선 음악계의 신체제 운동을 목표로 한 조선음악협회의 발기인회에 참여하였다. 해방 직후 국민학교 음악 교과서 제작에 참여하여 직접 작사 · 작곡한 「학교종」을 실었다.
일제강점기에 재즈 등 당시 유행하던 대중음악을 “유흥적이고 음탕하여 아무런 예술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해방 이후 음악 평론가 박용구와 이 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박용구가 1947년 5월 12일 자 『문화일보』의 「허망에의 고별-도미음악시비」를 통해 김메리를 비판하자, 여기에 반박하는 「도미음악론-박용구군의 시비를 박(駁)함」을 1947년 5월 15일 자 『경향신문』에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박용구는 「도미음악가론-김메리씨의 허망」으로 다시 반박하였다.
1947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시간대학에서 음악교육학, 디트로이트 머시대학[Mercy College]과 웨인주립대학에서 의학연구공학과 미생물학을 공부하였다. 195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에는 미국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1978년부터 3년 동안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였고, 1985년에는 자선사업 단체 육영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950년 미국에서 펴낸 『한국의 민요[Folk Songs of Korea]』에 직접 편곡한 12곡의 민요를 한글 · 영어 가사와 함께 실었다. 1996년에는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을 펴냈다.
1980년 이화여자대학교 창립 94주년 기념식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