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는 그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크게 외적 특성과 내적 특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외적 특성으로는, 첫째 일정한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같은 제목 하에 발행된다는 정기성, 둘째 잡다한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게재하는 내용의 다양성, 셋째 책과 같이 꿰매어놓은 제책성을 들 수 있다.
한편, 내적인 측면에서 잡지는 그 기능상 신문이나 방송에 비해서 장기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따라서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한 오락면에서도 신문보다 다양한 기사를 통하여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종류는 그 분류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대상독자 및 그 내용의 주제 · 판형 · 간행회수 등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독자 및 그 내용에 따르면 크게 대중지(大衆誌, mass magazine) · 일반전문지(一般專門誌, class magazine) · 특수지(特殊誌, specialized magazine)로 나눌 수 있다.
대중지란 거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로서 그 내용도 가벼운 읽을거리 · 연예물 · 유머 · 사진 · 만화 등을 주로 다룬다. 이 대중지는 다시 종합지 · 여성지 · 남성지 · 사진잡지 · 연예지 · 유머오락지 · 다이제스트지(digest誌) · 대중문학지 · 만화잡지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이에 비하여 일반전문지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잡지를 말하는 것으로, 권위지(quality magazine) · 여론지(輿論誌) · 사회평론지 · 사상지(思想誌) · 순수문학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특수지는 일반 대중이 아니라 특수한 사회집단, 예를 들면 학자 · 의사 · 교사 · 종교인 · 우표수집가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를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비지니스 및 산업지, 과학 및 기술잡지, 학술지, 종교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잡지는 그 크기(판형)에 따라 포켓판(pocket, 11×15㎝) · 표준판(standard, 13×19㎝) · 플랫판(flat, 15×22㎝) · 대형판(19×26㎝)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간행횟수에 따라 월간 · 주간 · 격주간 · 순간 · 격월간 · 계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잡지는 문화의 전달 · 보호 및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여 인류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잡지는 1665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르 주르날 데 사방(Le Journal des Savants)』이다. 그러나 이는 극히 초보적인 단계로서 서적상들이 책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도서목록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 뒤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시사적인 수필이나 그 밖의 내용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1704년 데포(Defore, D.)는 런던에서 『더 리뷰(The Review)』라는 잡지와 신문의 중간형태의 것을 발간하였다.
처음에는 국내외 정치사건에 대한 논평만을 싣다가 뒤에는 문예 · 도덕 · 예절란을 두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 이와 비슷한 간행물의 발간을 촉진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스틸(Steele, R.)의 『태틀러(Tatler)』, 애디슨(Addison, J.)의 『스펙테이터(Spectator)』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잡지라는 용어, 즉 매거진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1731년 케이브(Cave, E.)가 영국에서 발간한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이라는 잡지에서부터였다.
이 잡지는 시사 · 시 · 전기 · 음악 및 여러 가지 피처(feature:신문의 특집 기사)물을 실었으며 삽화나 요약물도 게재함으로써 신문과 구별되는 잡지의 성격을 정립하였다.
그 뒤 유럽 및 미국에서 많은 잡지가 발행되어 오늘날과 같이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잡지의 등장은 개화기 서구문물과의 접촉과 함께 비롯되어 그 뒤 정치사적 기복에 따라 그 형태 및 추세가 변모, 발전해 왔다.
그 발전과정을 시대별로 구분하면 크게 개화기(1892∼1910) · 일제강점기 · 광복 이후로 나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는 다시 무단정치시대 · 문화통치기 · 암흑기로, 광복 이후는 혼란기 · 재건기 및 성장 · 발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기간은 역사적으로 가장 다사다난했던 파란의 시대였다. 서구의 신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오랜 전통 속에 묶여 있던 사상과 제도가 탈바꿈을 해야 할 내적 요인과 열강의 군사적 · 정치적 각축으로부터 보국독립(保國獨立)을 해야 한다는 외적 요인의 틈새에서, 안으로는 개화를 부르짖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여야 했던 고난의 시기였다.
따라서, 잡지 역시 매체형식으로서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발전을 하지 못하고 우리 나름의 특성적 발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잡지의 기점이 1896년에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1905년 이후에 발간된 잡지가 이 기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보여주듯이 이는 바로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이 기폭제가 되어 우리의 잡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잡지로서 그 출발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간에 발행된 잡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넷으로 세분해 볼 필요가 있다.
① 교회 계열에서 발간된 잡지들, ② 유학생들에 의하여 발간된 잡지들, ③ 단체 · 학회를 중심으로 발간된 잡지들, ④ 개화 · 계몽을 위주로 한 잡지들로, 특히 이 기간의 중요 잡지들은 ②와 ③에서 찾을 수 있다.
1892년 1월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Ohlinger, F.) 부부에 의하여 창간된,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잡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 이어 외국인들의 선교사업을 기반으로 한 영문잡지들이 계속 간행되었다.
1900년에 『트렌섹션 오브 더 코리아 브렌치 오브 더 아시아틱 소사이어티(Transaction of the Korea Branch of the Asiatic Society)』가 발간되었으며, 1901년에는 헐버트(Halbert, H. B.)에 의하여 『코리아 리뷰(Korea Review)』가, 1904년에는 『코리아 미션필드(Korea Mission Field)』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영문잡지의 창간은 우리의 개화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잡지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있어 의식과 방향을 주었으며, 둘째는 잡지 제작의 동기를 유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우리 나라에서의 러시아세력, 황태자의 최후 등과 같은 정치적 기사나 조선의 불교재흥, 우리 나라에서의 조상숭배 등과 같은 문화적 기사들을 게재함으로써 우리 나라 사정이나 역사연구에 귀중한 기록물로서, 또 의식계발의 촉매제로서 문화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일본유학생들에 의하여 발간된 잡지들은 모두가 유학생간의 친목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당시 독립자주사상의 고취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새로운 학술정치사상의 계발과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학생잡지의 종류를 발간연대순으로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창간연도 | 잡지명 |
---|---|
1896 | 親睦會會報 |
1906년 이전 | 帝國靑年會會報 |
1906 | 太極學報 |
1907 | 共修學報 |
1907 | 洛東江親睦會會報 |
1907 | 大韓留學生會報 |
1907 | 同寅學報 |
1908 | 大韓學會月報 |
1908 | 商學界 |
1909 | 大韓興學報 |
〈표 1〉 유학생잡지 |
단기간 내에 이와 같이 많은 잡지들이 유학생간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유학생의 절대수에 비하여 많은 숫자이나 당시의 잡지형식을 통한 민족의지의 발현으로 그 열의를 짐작하게 한다.
『대한흥학보』에 이르러서는 이들 유학생잡지가 전부 통합하는 현상도 보였으니, 이 시기 잡지들의 공헌은 근대화의 훌륭한 지침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1896년 11월 30일 독립협회는 잡지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를 A5판 30면 수준으로 간행하였다. 1897년 8월까지 월 2회 간행으로 지속된 이 잡지는 일제의 외세를 배척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하며 또한 민주주의에 의하여 민권사상을 앙양하고자 하였던 독립협회정신의 사상적 방향을 대변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삼았다.
따라서, 잡지의 성격으로 보면 잡지의 일반적 기능으로서의 역할에 앞서 정치적 사상 · 여론의 선도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력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잡지의 영향은 그 뒤를 잇는 잡지들에 하나의 모범이 되어 대중의 정치계몽의 역할을 가장 중요한 잡지의 기능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 뒤를 이은 대표적인 잡지들을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창간연도 | 잡 지 명 |
---|---|
1906년 7월 | 大韓自强會月報 |
1906년 10월 | 朝陽報 |
1906년 12월 | 西友 |
1907년 2월 | 夜雷 |
1907년 5월 | 大同報 |
1908년 6월 | 湖南學報 |
1908년 8월 | 畿湖興學會月報 |
1909년 4월 | 嶠南敎育會雜誌 |
〈표 2〉 단체 · 학회에서 발간한 주요잡지 |
이들은 한결같이 정치적 주장의 매체로서 비록 지령(誌齡)은 짧았지만 애국심을 앙양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운명을 만회하기 위한 민족감정의 결집에 중추가 되었다.
이들 중 특히 일제침략에 대항하였던 잡지로서, 우국의 붓을 내세우고 교육의 진흥으로 실력주의를 신념으로 하였던 것은 대한자강회의 『대한자강회월보』와 서우학회의 『서우(西友)』였다.
『대한자강회월보』의 성격이나 방향은 이 잡지 창간호에 게재된 동회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을 통해 국권회복은 오로지 자강(自强)에 의한 방법으로만 가능한 문제이며 자강의 길은 교육 및 산업을 진흥시켜 스스로의 힘을 길러냄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강정신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독립정신을 기르고, 밖으로는 외국의 문명과 학문을 수용함이 급선무임을 주장하였다.
이 월보가 표방한 것은 비록 기관지였으나 실제 내용의 구성은 종합지의 형태를 띠었다. 교육 · 식산(殖産) · 문원(文苑) · 소설 · 법률 · 공업정치 · 역사지리 등으로 내용의 항목을 나눈 것만 보아도 대한자강회의 관심범위가 얼마나 넓은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대한자강회월보』의 체재는 A5판 80면 내외로 1907년 7월까지 13호를 간행하다가 1907년 8월 31일 대한자강회에 대한 해산령에 의하여 폐간되었다. 당시 이 회의 회장은 윤치호(尹致昊)였다.
『서우』는 1906년 12월에 창간, A5판 50여 면으로 17호가 나온 뒤 1908년 6월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로 제호를 바꾸어 다시 1호부터 시작, 1910년까지 23호를 내어 모두 40호를 간행한 잡지이다. 발행인은 김명준(金明濬), 주필은 박은식(朴殷植)이었다.
‘서우’라는 명칭은 평안 · 황해 양도를 양서(兩西)라고 부른 데 연유, 그 지방의 사우(士友)가 모였다는 뜻으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일본에 비하여 너무나 후진된 현상들에 통탄하여 학회의 결성을 기반으로 한 국민계몽만이 이에 대항하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서우』의 이러한 발간의지는 이후 호남학회(湖南學會)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의 학회보 발간에 촉매제로서 연결되었다.
당시 국민적 의식에서의 과제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과제로서 일제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정치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이러한 침략에 수반되는 문제로서 하루속히 개화를 서두르는 문화계몽주의의 달성이라는 과제였다. 따라서, 정치적 주장에 비견할 만큼 한말 개화기에서의 잡지를 통한 문화계몽주의운동은 매우 찬연한 것이었다.
1905년 12월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수학잡지로서 『수리학잡지(數理學雜誌)』가 창간되어 과학 및 수학사상계몽과 신문명 소개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 1906년 11월에는 최초의 아동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가 창간되어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교양지의 기초가 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가뎡잡지(家庭雜誌)』가 창간되어 신생활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특히, 『가뎡잡지』는 당시의 모든 인쇄매체들이 국한문혼용이었음에 비하여 유독 순한글체로 간행되었다. 이 잡지의 발행인 겸 편집인은 신채호(申采浩)였으며 편집진으로 주시경(周時經) · 장지연(張志淵) 등이 활약하였다는 것 외에도 이 무렵에 벌써 대중 대상의 순한글잡지라는 발상이 시도될 수 있었다는 데에 더욱 높은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어 1908년 11월 창간된 『소년(少年)』은 결정적으로 잡지문화 형성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19세였던 최남선(崔南善)에 의하여 창간된 이 잡지는 가장 근대적 잡지형태의 내용으로서 잡지의 모양새를 이룩하였다는 점, 대중과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로서 독자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간행을 계속하였고, 신문학형성의 선두주자로서 문학적 개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잡지문화에 새로운 기원을 수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한반도』 · 『소년』 및 『수리학잡지』들에 이은 개화계몽의 문화운동잡지들은 종교지 · 과학지 등의 분야로 전문지의 발아까지를 촉진하였다. 1910년 이전까지의 잡지들의 목록은 〈표 3〉과 같다.
창간연도 | 잡지명 | 창간연도 | 잡지명 |
---|---|---|---|
1902 | 동양교보 | 1908 | 法學協會雜誌 |
1904 | 一進會會報 | 1908 | 자선부인회잡지 |
1907 | 法政學界 | 1909 | 工業界 |
1907 | 漢城月報 | 1909 | 京城孤兒園週報 |
1907 | 漢陽報 | 1909 | 商工月報 |
1908 | 奬學月報 | 1910 | 天道敎會月報 |
1908 | 敎育月報 | 1910 | 圓宗 |
〈표 3〉 개화 · 계몽을 위한 잡지 |
한말에 있어서의 잡지는 뚜렷한 성격과 사명을 지니고 항일운동의 가장 강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체결된 뒤 매체에 대한 탄압은 대단히 극심하였다.
신문 · 잡지 등 간행물에 대한 취재탄압은 이미 합방 전인 1907년에 「신문지법(新聞紙法)」을 공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09년에 공포한 「출판법」은 저작물의 사전 원고검열, 출판허가주의를 포함하여 언론의 암흑기를 만들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은 별개의 법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규제를 확대, 심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신문지법」에 의해서만 정치 · 시사문제의 게재여부를 판정받을 수 있게 한 반면, 「출판법」에서는 문예 · 교양물만을 허가하도록 함에 따라 잡지 및 출판물들은 자동적으로 「출판법」의 판정을 받도록 하여 문예 · 교양물만을 게재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잡지는 종교 분야 · 기술 분야 및 문학전문지들만이 허가되고 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간행된 잡지는 총 49종뿐으로 그 목록은 〈표 4〉와 같다. 이 기간에 창간된 잡지로서 특히 의미가 있었던 것은 『붉은 저고리』 · 『청춘』 · 『아이들보이』 및 『유심』 등이 있다.
창간연대 | 잡지명 | 창간연대 | 잡지명 |
---|---|---|---|
1910 | 時兆月報 | 1916 | 朝鮮佛敎史 |
1911 | 侍天敎月報 | 1916 | 東西醫學報 |
1911 | 朝鮮醫學雜誌 | 1916 | 敎會指南 |
1912 | 朝鮮佛敎月報 | 1916 | 神學世界 |
1912 | 學界報 | 1917 | 至氣今至 |
1912 | 붉은 저고리 | 1917 | 朝鮮政敎報 |
1912 | 太平洋雜誌 | 1917 | 朝鮮佛敎叢報 |
1913 | 新開世界 | 1917 | 半島時論 |
1913 | 新文界 | 1917 | 朝鮮文藝 |
1913 | 아이들보이 | 1917 | 靑年 |
1913 | 새별 | 1917 | 基督敎靑年 |
1913 | 海東佛敎 | 1918 | 女子界 |
1913 | 經學院雜誌 | 1918 | 週日學校硏究 |
1913 | 우리의 가뎡 | 1918 | 聖經雜誌 |
1914 | 學之光 | 1918 | 朝鮮醫學界 |
1914 | 醫學月報 | 1918 | 神學指南 |
1914 | 龜岳宗敎 | 1918 | 惟心 |
1914 | 中央靑年會報 | 1918 | 泰西文藝新報 |
1914 | 靑春 | 1918 | 培材學報 |
1914 | 公道 | 1918 | 校友學報 |
1915 | 佛敎振興會月報 | 1919 | 學友 |
1915 | 中央侍天敎會 | 1919 | 宣敎記念會報 |
宗報 | 1919 | 選民 | |
1915 | 崇實學報 | 1919 | 創造 |
1915 | 法學界 | 1919 | 三光 |
〈표 4〉 무단정치기간에 발행된 잡지 |
최남선은 『소년』을 통하여 잡지의 근대화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1911년 5월 이 잡지의 폐간에 머물지 않고 계속하여서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붉은 저고리』 · 『아이들보이』 · 『새별』 · 『청춘』들을 만들어냈다. 1913년 1월 1일자로 창간한 『붉은 저고리』는 타블로이드판 8면의 체재로 매월 1·15일 등 2회 간행하였으며 잡지형태상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표지 표제 위에 ‘공부거리와 놀이감의 화수분’이라는 현대적 표어도 게재하였으며 역사물과 과학 · 산술 등의 학습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편집을 지향하였다. 이 잡지를 제12호에 멈추고 같은 해 9월에 『아이들보이』와 『새별』 등 2종의 잡지를 동시에 간행하였는데, 이 또한 현대적 간행체재를 창조하였다.
이들 잡지는 신문장체(新文章體) 운동을 내세워 문장의 개혁을 기도하였고 ‘글꼬느기’난을 두어 어린이들의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두 잡지는 1914년 『청춘』의 창간을 위하여 폐간되었다. 『청춘』은 독자의 대상을 보다 넓혔던 잡지였다.
어린이 계몽교육으로부터 일반 계몽교육으로 뜻을 넓힌 최남선은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빈말 맙시다. 헛노릇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걱정 맙시다. 근심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온 힘을 배움에 들입시다. 우리는 여러분으로 더불어 배움의 동무가 되려고 합니다. 다 같이 배웁시다. 더욱 배우며 더 배웁시다.”라고 주장하였다.
『유심』은 한용운(韓龍雲)이 주간한 종교잡지였다. 불교적 수양을 주로 하고 문예작품을 게재한 잡지로서 또한 개인잡지로서의 잡지형식을 시도한 대표적 잡지로 평가할 수 있다. 이 기간중에 간행된 49종의 잡지 중 4종은 해외에서 간행된 잡지이다. 따라서, 「출판법」에 따라 허가된 잡지는 45종뿐이었다.
해외간행잡지는 『학계보(學界報)』와 『학지광(學之光)』이 일본 유학생회잡지였고, 일본 유학생들 중 여자유학생들이 만든 것이 『여자계(女子界)』였다. 또 하나는 『태평양잡지』로서 이승만(李承晩)을 발행인으로 하여 호놀룰루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B5판 100면의 상당히 부피 있는 체재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난 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기본정책을 완화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게 된 시기이다. 따라서, 비교적 어느 시대보다 잡지의 양적 · 질적 발전이 추구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10월 유고문(諭告文)’을 통하여 언론 · 집회 · 출판 등에 있어서 완화할 뜻을 표명함에 따라 새로운 잡지들이 나타났다(〈표 5〉).
구분 | 잡지명 | 발행기간 |
---|---|---|
종합지 | 서울 | 1919. 12.∼1920. 12. |
開闢 | 1920. 6.∼1926. 8. | |
共濟 | 1920. 9.∼1921. 1. | |
啓明 | 1921. 5.∼1933. 1. | |
半島之光 | 1921. 9.∼未詳 | |
我聲 | 1921. 3.∼10. | |
新天地 | 1922. 3.∼未詳 | |
新生活 | 1922. 3.∼9. | |
共榮 | 1922. 7.∼1923. 6. | |
東明 | 1922. 9.∼1923. 6. | |
朝鮮之光 | 1922. 11.∼1930. 11. | |
문예지 | 創造 | 1919. 2.∼1921. 5. |
廢墟 | 1920. 7.∼1921. 1. | |
薔薇村 | 1921. 5. | |
白潮 | 1922. 1.∼1923. 9. | |
金星 | 1923. 11.∼1924. 5. | |
靈臺 | 1924. 8.∼1925. 1. | |
朝鮮文壇 | 1924. 9.∼1936. 6. | |
〈표 5〉 문화통치기 초기의 대표적인 잡지 |
첫째 민족주의적 사상이 일단 체계화됨으로써 자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관심의 범위가 확대되어 정치면뿐 아니라 경제 · 사회면으로까지 논평이 확대되어 잡지의 내용이 종합지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과,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도됨으로써 학술전문지적 형태의 잡지편집이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전의 출발점은 종합지로서의 『개벽(開闢)』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1920년부터 1926년까지 통권 73호의 『개벽』의 작업은, 민족여론 형성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화형태로서의 잡지의 위치를 확립시켰다는 데서 우리 잡지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개척적 잡지전통의 확립에 힘입어 그 뒤 종합지는 『신동아(新東亞)』 · 『조광(朝光)』 · 『동광(東光)』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사상의 체계화, 신학문의 분석적 도입, 현대문학의 형성, 독자여론의 결집 등에 핵심적 매체로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 창간된 또 하나의 잡지 『한글』은 전문학술지의 모습으로서 또 다른 민족사상 고취의 상징이 되었다.
1927년 국문연구의 학술지로서 창간된 『한글』은 신명균(申明均)의 편집 · 발행으로 신소년사(新少年社)에서 간행된 것인데 이는 그 뒤 1932년 5월에 조선어학회가 탄생함으로써 조선어학회의 『한글』로 합류되었다.
『조선민속(朝鮮民俗)』은 1933년 1월에 창간되어 겨우 3호에 머무른 잡지이기는 하나 발행인 송석하(宋錫夏)에 의한, 민속을 통한 한국학연구에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지대한 의미를 가지는 잡지였다.
이 잡지의 필진인 송석하 · 손진태(孫晉泰) · 백낙준(白樂濬) · 정인섭(鄭寅燮) 들은 한국의 지식과 고유한 민족문화의 발굴을 통하여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전해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4년에 창간된 『진단학보(震檀學報)』 역시 제14호로 일단 폐간되기는 하였으나 한국학의 학풍을 수립하고 그 권위를 형성하는 데 구체적 기여를 한 잡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간행된 잡지로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잡지의 총수는 622종이다. 이 시기에 시도되지 않았던 잡지의 분야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동안 여성잡지와 아동잡지의 발전은 획기적인 것으로, 아동잡지는 『어린이』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1933년 3월 개벽사(開闢社)에서 나온 이 잡지는 방정환(方定煥)이 주관하였는데 그 이름으로서 ‘어린이’라는 말을 새로 지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아동문학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여성지 역시 1923년 개벽사에서 창간한 『신여성(新女性)』이 상업여성지로서의 기틀을 닦았다. 1934년 4월까지 장수한 이 잡지의 뒤를 이은 것은 『신가정(新家庭)』이었는데 1933년 1월 창간한 이 잡지는 『신동아』와 더불어 여성의식 계발의 주체가 되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전쟁수행을 위한 자신들의 일본체제 유지를 위하여 이른바 ‘조선문화말살정책’을 수립하고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을 한층 적극화하여 또 한번의 질식상태로 매체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거의 모든 간행물들은 다시 폐간조처되었고 일문으로 간행되는 친일경향의 잡지들만이 존속하였다. 1944년에 한국인 발행잡지는 22종으로까지 위축되었고 그 반면 일어 사용의 일본인 발행잡지는 262종으로 증가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 친일잡지는 『신시대(新時代)』 및 『국민문학(國民文學)』이었다. 『신시대』는 1941년 1월에 창간되어 대중적 취미 · 오락기사와 일제에의 협력을 요청하는 글들로만 편집되어 1945년 종전까지 55호가 간행되었다.
1941년 4월 유일하게 남아 있던 문학지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마저 폐간시킨 일제는 같은 해 11월 『국민문학』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개인보다 국가가 앞서며, 따라서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1945년 7월까지 극단적 친일론의 온상으로서 활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춘추(春秋)』는 이러한 암흑기에서 지식인의 고통이 어떻게 수용, 용해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이 잡지는 1941년 2월 친일적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창간의 기회를 얻었으나 친일적 기사와 병행해서 민족의 고유문화에 관한 학술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이 시기에 지속된 거의 유일한 민족문화지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 역시 완전히 일본어로만 잡지를 발행하도록 강요를 받았으며 제8호까지밖에 발행되지 못하였다.
1945년 말부터 1950년까지의 잡지계는 당시의 정치 · 사회상황과 똑같이 모든 가능성의 주장과 실험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잡지목록을 보면 종합지 · 여성지 · 아동지 등의 대표적 형식의 잡지들뿐만이 아니라 학생지 · 전문지를 비롯, 기관지 · 지방지들까지 거의 모든 잡지간행 가능목록을 망라하였다.
1945년 12월에 대구에서 간행된 종합지 『건국공론(建國公論)』의 경우, 지방 간행 종합지이면서도 창간호를 3만 부나 발행하여 매진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잡지 발행인은 그때의 간행의지를 “우리 글에 대한 갈망이 독자보다도 편집자 자신에게 더 큰 욕구였다.”고 동지(同誌)에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성공적인 판매 부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잡지가 단명으로 끝났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판매조직의 미숙으로 판매는 가능하였으나 수금을 조직적으로 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물가의 폭등에 있었다. “1945년 8월말을 100으로 잡은 물가지수는 1년 뒤인 1946년 8월말에는 1,309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당시의 물가추세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발행된 잡지들이었으나 그 내용은 충실하였다. 그 중에도 이때 나온 아동지들, 즉 『소학생』(1946) · 『진달래』(1947) · 『새동무』(1947) · 『어린이』(속간, 1948) · 『어린이나라』(1949) 등의 내용상의 품격은 현재의 아동지들에도 귀감이 될 수 있다.
이 밖에도 문학지로서 문학사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문예(文藝)』는 1949년 8월 창간되어 첫호 4,000부가 10일 만에 매진되었다.
종합지로서는 『신천지(新天地)』가 대표적인 것으로 1946년 1월부터 1956년 폐간될 때까지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일제기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개벽』(1946.1.∼1949.3.)과 『조광』(1946.3.∼1948.12.)이 복간되었으나 종간되고 말았으며, 일제 하에서 가장 오랜 동안 발행되었던 김동환(金東煥)의 『삼천리(三千里)』도 타블로이드 크기의 신문형태로 복간되어 6·25 동란까지 발행되었다.
6·25로부터 9·28 서울수복까지의 기간은 8·15 직후보다도 더 황폐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은 잡지문화에서도 공백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공백 속에도 『전선문학(戰線文學)』(1952.4.)이라는 육군 종군작가단의 잡지가 간행될 수 있었다. 6·25동란은 잡지간행 의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즉, 잡지가 계몽적 · 문화적 가치로서만 인식되던 관점에서, 상품적 가치라는 또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이 인식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희망(希望)』(1951∼1963.5.)이었다. 이는 경영면에서 최초로 성공한 대중지로서 그 부수가 8만부까지 신장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1953년 4월 부산에서 창간된 『사상계(思想界)』, 9월에 대구에서 창간된 『학원(學園)』, 1955년 1월 서울에서 창간된 『현대문학(現代文學)』 등의 중요잡지가 발간되었다.
『사상계』는 우리에게 최초로 잡지 저널리즘에 의해 탄생되는 탤런트 필자군(筆者群)을 보여주었고, 언론의 형성이 꼭 신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970년 9월까지 지속된 이 잡지는 발행인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하여 그 종언을 보게 되기까지 1960년대를 이끌면서 광복 후 첫 세대의 의식을 형성하였다.
『학원』의 경우도 학생잡지 성공의 효시를 이루면서 잡지의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이 잡지는 학생문단란을 통하여 1960년대의 한국문단을 형성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창간되어 오늘에까지 현존하는 최장수 문학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 기간의 마지막 시기, 즉 4·19혁명이 일어난 뒤 5·16까지의 기간 동안 잡지는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렸다.
그 결과 이 짧은 기간 동안 창간된 잡지수는 무려 1,400여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창간된 것으로 아직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대한교육연합회가 간행하는 교육전문지 『새교육』뿐이다.
5·16 후에는 잡지의 발행이 정비되었다. 5·16 이후 2년 동안 모든 잡지를 재정리함으로써 1,000종을 상회하던 잡지수가 1961년 229종, 1962년 224종, 1963년 206종으로 격감되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잡지들은 기업으로서의 정상적 체제확립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막연한 발행으로 창간과 폐간이 잇달았던 발행관행으로부터 소규모로나마 수지타산을 가늠하고 독자층의 능력과 관심을 염두에 두는 편집정책의 수립도 이루어졌다. 판매망의 구성, 자체PR에도 관심을 가져 그 동안 추상적 세계로만 있었던 잡지 시장을 현실적 · 합리적 시장으로서 파악하는 최초의 시기를 확립하였다.
1960년대로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잡지는 그 형태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하였다. 종합지로서 『아세아(亞細亞)』(1970.10.)는 공중에게 시판되는 잡지로서 처음 가로쓰기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노력은 『뿌리깊은 나무』(1970.2.∼1980.7.)로 이어졌다.
문학계간지의 성공도 이 기간에 있었다.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은 1965년 1월에, 『문학(文學)과 지성(知性)』은 1970년 4월 창간되어 1980년 7월 같은 때 폐간될 때까지 잡지로서의 학파구성(에콜화)이라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 두 계간지는 그 동안 정치적 의식화로써만 잡지의 권위가 형성되던 틀을 벗어나 정신적 의식화로써도 잡지의 권위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68년을 기점으로 주간지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선데이서울』 · 『주간한국(週刊韓國)』 · 『주간경향(週刊京鄕)』 · 『주간여성(週刊女性)』 · 『주간조선(週刊朝鮮)』 등의 집중적인 창간과 이들 주간지의 통상 100만부를 넘는 독자확보는 잡지의 영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상업주의 성향이 강하였으며 주간잡지에 있어서의 고급지의 성공률은 미약하였다. 1973년 11월 창간되어 1975년 10월까지 만 2년간 지속된 『서울평론』이 지식인 주간지로서 최초의 모범을 보였으나 시장성의 협소로 더 이상의 성장을 보지 못하였다.
종교지라는 특수지가 종합지적 역할을 하는 경우란 아마도 우리 사회만이 가지는 특별한 경향이 될지도 모른다. 더욱이 종교인들의 개인잡지 『씨ᄋᆞᆯ의 소리』를 비롯하여 『현존(現存)』 · 『제3일(第三日)』 등이 만들어낸, 비록 적은 부수이기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충분히 잡지로서의 성과로 인식될만하다.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의 장수 요인 및 그 편집내용의 품격 역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성원에 의해서이기보다는 비기독교인들인 일반 독자에 의해서 이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잡지문화는 1980년대의 문턱에서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었다. 1979년 10월 26일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시해 사태 이후 제5공화국을 주도하려는 신군부 세력의 ‘사회정화’는 잡지계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80년 7월 31일 주간, 월간 등 1,434종의 정기간행물 중 1,262종만 남기고 172종의 등록을 취소, 발행을 중지시켰고, 그 해 11월 28일에도 67종의 정기간행물을 정비하였다.
그 중에는 『뿌리깊은 나무』 · 『창작과 비평』 · 『문학과 지성』 · 『씨ᄋᆞᆯ의 소리』 등과 같은 건전한 잡지와 오랜 동안 서민대중들의 벗이었으나 경영이 어려웠던 『아리랑』 · 『명랑』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광복 이후 두 번째로 겪는 잡지계의 수난사였다.
또한, 그해 12월에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고 잡지를 포함한 모든 정기간행물은 이 법에 의해 등록하도록 하였다. 당시 종합잡지의 창간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으나, 전문지에 대하여는 퍽 개방적이었다.
따라서 1980년대 전반기부터 본격적인 잡지의 전문화시대가 개막되기도 하였다. 1983년 중 당시 문화공보부에 새로 등록되어진 잡지는 184종이었는데, 그 중 유가전문지(有價專門誌)가 56종이나 되었다.
이들은 주로 관광, 취미, 스포츠, 여행 등 레저 분야에 관한 전문지였으나 수적으로는 경제, 문화, 문예 등의 잡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1980년 이후의 잡지 발행의 종수 변화를 살펴보면 월간의 경우 1981년 상업지와 비상업지가 각각 227종과 225종으로서 거의 비슷하였던 것이 1985년에 이르러는 비상업지가 678종으로 340종의 상업지보다 도리어 많아졌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격월간이나 계간의 경우에서도 나타났는데, 특히 1983년에는 비상업지가 급증되기도 하였다.
이는 기업이나 단체 등에서 자체 내의 조직의 체계화와 활성화를 위한 매체나 대외적인 PR을 위해 잡지를 이용하게 된 것이라 보아진다.
이러한 전문지나 기업체의 사보 등의 활성화가 오늘날 잡지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신규 종합잡지의 등록 억제는 오히려 기존 잡지사에게는 판매망 구축의 용이와 정가판매제의 정착으로 안정세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1980년 이후 계속된 불경기로 인한 판매 부진은 반품 잡지의 양을 증폭시켜 잡지사의 경영에 악영향을 미쳤다.
1987년의 6·29 민주화 선언은 잡지계에도 자유의 바람을 몰고 왔다. 그 해 10월 19일의 ‘출판자율화’ 조치는 잡지업계로서는 새 활력이었다.
정치 · 사회 전반의 민주화 선언으로 1987년 말에는 120종의 주간, 월간지들이 창간을 위해 등록을 마치면서 다시 잡지 홍수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1987년 11월 28일에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종전 잡지의 등록을 억제해 왔던 정책을 등록자율화로 바꿈으로써 잡지 창간의 붐을 이루게 되었다.
1987년 12월까지 당시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정기간행물은 2,412종으로서 그 중 월간지는 1,298종에 이르고 있다. 이 수치는 6·29 이전의 2,236종의 정기간행물보다 176종이나 더 등록된 셈이다.
이것은 과거 제도언론의 틀 속에서 억제 당했던 잡지문화가 갑자기 자율화의 이름으로 풀려난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 보아졌으나 1993년 상반기 통계도 정기간행물의 등록은 7,340종으로 1987년 대비 204%나 늘어났다.
한국의 잡지는 6·25 전쟁과 군사정권의 언론통제 아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필요 · 적절한 정보와 지식 전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1987년의 민주화 이후 크게 비약하게 되었는데, 먼저 잡지의 등록이 대폭 증가했음을 들 수 있다.
한편, 등록만 하고 실제로 잡지를 발행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1994년의 경우를 보면, 잡지 종수는 유가지(有價誌)가 2,563종, 무가지(無價誌) 3,194종으로 도합 5,757종이 간행되었다. 그 무렵 컬러풀한 대형의 여성지와 레저 관련지들이 두드러지는 등 잡지의 종류도 다양해져 서점 진열에서도 경쟁적이었다.
1987년 한국이 세계저작권협약(UCC)에 가입하면서 외국 잡지와의 저작권 계약에 의한 라이선스 잡지가 2000년 현재 50여 종이나 창간되었다.
1987년 9월 『행복이 가득한 집(Better Homes & Gardens)』의 창간에 이어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1991.10.), 격월간지 『지오(GEO)』(1992.9. ·10.), 월간으로는 『엘르(Elle)』(1992.11.), 『휘가로(Figaro)』(1993.11.), 『메종 마리 끌레르(Maison Marie Claire)』(1994. 11.), 『에스콰이어(Esquire)』(1995.4. 등록), 『하퍼스 바자(Haper's Baazar)』(1995.4. 등록), 『보그(Vogue)』(1996.3. 등록), 『위드(With)』(1996.6. 등록), 『인터넷 월드(Internet World)』(1996.9. 등록) 등이 발간되고 있다.
2000년에는 1888년 10월 미국지리협회가 창간한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2000.1.)을 비롯하여 『앙 · 앙(an · an)』(2000.3.),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2000.9.) 등의 한국판이 창간되어 잡지계는 라이선스 잡지라는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 판권의 라이선스 잡지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며, 더욱이 1999년 1월 1일부터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 시행으로 시장이 개방됨으로써 해외 잡지의 본격적 유입이 합법화되어 국내 잡지와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한때 표면적으로 호황을 누리는 듯하였던 한국 잡지계는 1997년 말의 IMF 쇼크로 허약했던 경영 기반이 흔들리면서 그 양상이 바뀌어지고 있다.
단적인 지표는 폐간지의 속출인데, 이 폐간지는 1993년 299종이었던 것이 1998년에는 522종으로 5년 사이에 74.5%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1998년의 신규 잡지 등록은 386종이었으나 창간된 잡지가 170종으로 폐간된 잡지는 신규 등록이나 창간된 것보다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 자료에 의하면 1998년 현재 750개의 잡지사에서 2,200종의 유가지를 발행, 연간 6천800억원의 판매와 광고 매출 2천400억원(전체 광고 시장의 5%)으로 총 9천200억원의 시장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IMF 이후는 잡지시장에서의 대폭적인 광고 감소로 많은 잡지가 폐간되었다. 이 IMF의 여파로 1998년 한 해 동안 잡지를 포함한 정기간행물의 등록 종수는 6,783종으로 이는 1997년의 7,480종보다 10%나 감소한 수치로서 월간 잡지의 경우는 14%나 줄어들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전자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종이 잡지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잡지인들은 전자잡지를 기획, 시도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히 진전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때 패키지형의 CD-잡지는 독자의 호응이 없어 『Click』 · 『X피플』 · 『사이버 타임스』 등이 창간되었다가 상업성이 없어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1996년에 인터넷 잡지의 하나로 『웹진 스키조』가 창간되면서 그 해 『image』 · 『한컴 온라인 매거진』 · 『온더넷』등 40종의 웹진(Web Magazine 의 합성어)이 선을 보였는데, 1999년에는 『인 · 웹진』 등 온라인상의 웹진이 총 400여 종으로 늘어나는 급속한 증가세를 보였다.
이러한 통신형 PC-잡지와 인터넷 잡지 등의 신조류가 앞으로 기존의 잡지문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아니면 종이잡지의 자리를 새 전자잡지에 내어줘야 하는 것인지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이밖에 온라인 잡지라 할 E-mail Magazine 도 종이 잡지의 영역을 넘보고 있어 기존 잡지업계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자시대에 부응해야 하는 기획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21세기의 정보사회를 맞이한 오늘의 잡지는 전문화의 길로 세분되어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 잡지의 종수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수십 종의 컴퓨터 관련 잡지를 비롯하여 자동차, 빵, 시계, 안경, 다이아몬드, 부동산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전문 직종의 제호를 붙인 잡지가 하루에도 두세 종씩 탄생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소형 잡지의 성공적인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이제는 잡지를 찾는 독자 측과 제작하는 측은 물론 잡지의 사활을 좌우하는 광고주의 동향도 크게 바뀌어졌다는 데서 향후 한국 잡지의 생존 방향을 설정해야만 한다.
문화관광부의 최근 자료에 의하면, 국내 잡지업계는 750여개사에서 2천200여종의 유가지를 발행, 연간 6천800여억원의 매출에 잡지 광고의 연간 매출 2천400억원(전체 광고 시장의 5% 정도)으로 총 9천200여억원의 시장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잡지시장의 광고 물량의 감소가 폐간 잡지를 양산하고도 있지만 그 직접적인 영향은 지난 1998년의 IMF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독자의 확보보다 광고에 더 의존했던 잡지업계의 시장 관행이 개선되어야 하는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1998년의 월간 이하의 발행 잡지는 4,021종으로서 1997년의 4,702종보다 681종이 줄어든 것이다. 특히 월간지만의 통계로는 1998년이 2,454종으로 1997년의 2,853종보다 399종이 줄어든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1999년도 발간 월간지는 2,282종으로 전년보다 172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7월 현재의 월간지 등록 현황은 2,424종으로 전년 말보다 142종이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실제 창간되어진 숫자는 연말의 집계를 봐야 하므로 내일의 잡지산업 전망이 불투명해 보인다.
또한, 현대 디지털 사회는 산업 전반을 바꾸어 나아가고 있어 문화산업의 하나인 잡지업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잡지의 편집과 경영방식으로는 오늘의 정보시대에서 살아 남기 어려워졌다. 종이가 아닌 전자매체와의 연관지을 새로운 잡지 편집 경영의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때이다.
CD나 PC, 인터넷 통신과 같은 뉴미디어 시대의 온라인 잡지의 등장은 머지않아 종래의 오프라인 종이잡지 문화를 잠식하게 되리라는 전망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