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 일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구즈우 슈키치[葛生修吉]에 의해 부산에서 창간된 『조선일보』가 『부산일보』의 전신이었고, 1905년 11월에 『조선시사신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1907년 10월 1일 창간되었고, 1908년 아쿠타가와 다다시[芥川正]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제호를 다시 『부산일보』로 바꾸었다.
아쿠타가와는 청 · 일전쟁 당시 종군 주1로 조선에 온 이래 ‘문장보국’의 기치 아래 대구에서 『대구신문』이라는 일본어 신문의 주필을 맡아 한국을 주2로 만드는 데 적극 협력한 인물이었다. 1906년 『조선시사신보』에 입사한 뒤 부산의 거대 자본가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가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등의 지원 아래 경영권을 인수해 사장 겸 주필로 취임하였다.
창간 당시 겉으로는 불편부당 독립의 견지에서 정당이나 관권, 민권 등에 편중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신뢰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익, 그리고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시하였다. 아쿠타가와는 메이지[明治] 천황이 즉위하면서 내세운 이른바 ‘5개조 어서문(御誓文)’을 사시로 삼았다.
창간 이래 1928년 사망할 때까지 아쿠타가와가 줄곧 사장 겸 주필을 맡았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따로 두었다. 1928년 아쿠타가와가 병사한 이후 부산일보사의 대주주 가운데 한 사람이던 가시이가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1919년 자본금 25만 원의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1921년 기준 아쿠타가와가 850주를 소유한 최대 주주였으며, 그의 아들 아쿠다가와 쯔요시[芥川毅], 후쿠나가 세이지로[福永政治郞], 가시이, 오이케, 하자마 등이 100주 이상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였다.
주식회사로의 변경과 아울러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920년 4월 부산역과 부산부두 근처에 큰 사옥을 신축하였다. 1923년 1월부터는 주3 · 주4 발행 체제로 들어갔다. 판매 구역은 조선과 일본을 넘어 만주까지 확대되었다. 1929년 당시 조선의 경성[서울], 춘천, 대구, 평양, 진주, 전주, 마산, 통영, 여수, 군산, 원산, 목포, 광주, 공주, 청주, 대전, 인천, 강릉, 포항, 김천, 함흥, 청진, 나남, 회령 등과 일본의 도쿄, 오사카, 간몬[關門 : 시모노세키(下關)와 모지(門司)], 만주의 간도, 펑텐[奉天], 다렌[大連], 하얼빈 등에 지국 또는 지사가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강원도, 호남선 연선, 평양 등지에 총무소를 두어 전국의 지사와 지국을 통할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경북판, 호남판, 중선판, 강원판 등의 지방판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41년 조선총독부의 1도 1지라는 신문 통합 정책에 따라 부산에서 발행되던 『조선시보』와 마산에서 발행되던 『남선일보』를 통합하여 부산 경남 지역의 유일한 신문이 되었다.
창간 당시 불편부당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그것은 일본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본 우월주의 때문에 창간 이래 줄곧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조선인을 모욕하거나 무시하는 내용의 보도가 빈발해 그때마다 조선인 언론이나 사회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