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공영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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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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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이다. 일본이 1930년대까지 영유했던 ‘일만지[일본, 만주, 중국]’ 블록에, 1940년대에는 동남아시아까지 편입시켜 일본을 맹주로 하는 지역 위계 구조로 만든 개념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금도 패권적 지역주의의 망령으로써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존공영의 구호와는 달리 위안부, 징병, 징용, 강제연행 등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아시아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목차
정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
내용

1938년 육군성 군무국의 이와쿠로 히데오[岩畔豪雄] 주1와 참모본부의 호리바 가즈오[堀場一雄] 주2가 작성한 「국방국책안」에 동아공영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이때 동아공영권의 구조는 일본을 중심으로 동심원적으로 자존권, 방위권, 경제권으로 위계화되었다. 자존권은 일본 열도와 만주, 중국 북부, 몽골을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키고, 방위권은 시베리아, 중국 중남부, 버마 동부의 동남아시아, 그리고 자바, 수마트라 및 북태평양 해역 도서를 포괄하는 지역을 말한다. 경제권은 방위권 외곽의 자원 공급 지역인데 인도와 호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후 중일전쟁[1937년 발발][^3]이 장기화되면서 교착 상태에 빠지고 미국과의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유럽에서 독일이 전격전으로 눈부신 승리를 거두자 힘의 공백 상태에 빠진 남방의 구 프랑스령, 구 네덜란드령을 침략하는 정당화의 논리로 대동아공영권이 등장하였다.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은 1940년 7월 「기본국책요강」기에서 “황국의 국책은 [중략] 황국을 핵심으로 하고 일본과 만주, 지나[=중국]의 강고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데 있다”는 대외정책의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고노에 내각의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였다. 마쓰오카는 일본의 외교 방침이 “먼저 일만지를 일원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주4 기습을 시작으로 아시아 지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대외적인 목표로 내걸었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 말레이반도에 상륙하고 나아가 인도네시아, 버마를 손에 넣고, 뉴기니까지 진출하였다. 동남아시아 침략의 목적은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 획득이었지만, 이러한 목적을 은폐할 구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은 1942년 1월에 열린 시정연설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근본 방침이 “대동아의 각 국가와 민족으로 하여금 각각 분에 맞게 해, 제국을 핵심으로 하는, 도의에 의거한 공존공영의 질서를 확립하는 데 있다”고 표명하였다.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면밀한 계획에 의해 수립된 것이 아니라 제2차 주5 발발이라는 세계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급조된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범위가 분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용도 유동적이었다.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 직후만 해도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점령지의 자원 확보와 치안 유지를 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이후 전황이 악화되고 1943년 가을부터 연합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예상되자 점령지의 자발적인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의 수정이 시도되었다. 초기 대동아공영권의 주6적 색채를 자주 독립, 평화 호혜라는 구호로 주7시키면서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려는 대동아회의[1943년]가 개최되었지만 오히려 참가국 선정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대동아공영권의 내부 모순을 증폭시켰다. 특히 대동아공영권에서 지도국[내지]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외지][^8]였던 조선은 대동아공영권의 내부 주9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대동아공영권은 주10 시기 일본이 표방한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이자 19세기 말 이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지역주의 이념이었지만 실체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매우 공허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당연히 사라져야만 하는 허구의 논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날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일본 우파의 역사관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일본의 전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안에 살아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허영란, 『남양과 식민주의 : 일본 제국주의의 남진과 대동아공영권』(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논문

김영숙, 「‘대동아공영권’의 붕괴와 동남아시아: 버마와 필리핀을 중심으로」(『이화사학연구』 67,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2023)
이형식, 「‘내파’하는 ‘대동아공영권’: 동남아시아 점령과 조선통치」(『사총』 93,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8)
최규진, 「대동아공영권론과 ‘협력적’ 지식인의 인식지형」(『역사문화연구』 5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김경일,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아시아의 정체성」(『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창비, 2005)
임성모, 「대동아공영권 구상에서의 ‘지역’과 ‘세계’」(『세계정치』 26-2,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2005)
주석
주1

제이 차 세계 대전 때까지 일본에서 ‘중령’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2

제이 차 세계 대전 때까지 일본에서 ‘소령’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3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주4

미국 하와이주, 하와이 제도(諸島)의 오아후섬에 있는 만. 일본의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말샘

주5

세계 경제 공황 후, 파시즘 체제에 있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나라와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 사이에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독일과 소련의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 1945년 5월에 독일,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우리말샘

주6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 정책. 우리말샘

주7

내용이 없이 거죽만을 좋게 꾸밈. 우리말샘

주8

정치적·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나라.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본국에 대한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 자본 수출지의 기능을 하며, 정치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우리말샘

주9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 중국 초나라의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 하고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10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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