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경상북도 대구군[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해선(姜海先)이고, 강석자(姜石子, 姜錫子)라는 이름도 썼다.
14세 때 경성의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에 들어갔다. 1917년 이 조합의 대구 출신 기생들이 중심이 되어 한남권번(漢南券番)을 만들자, 한남권번에 들어갔다. 당시 한남권번은 서울의 대표적인 기생 조직으로, 일종의 공연 단체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향란은 한남권번에서 가무에 뛰어난 명기로 이름을 날리다가 20세 때 기생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교제하던 남자의 지원으로 글을 배우고 1921년부터 배화여학교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다녔다.
강향란이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22년 6월의 단발 사건이었다. 남자 강습소에서 공부하기 위해 단발을 하였는데, 이 사실이 1922년 6월 22일과 24일 자 『동아일보』에 ‘단발랑(斷髮娘)’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때 “여자도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지않다. 이전의 기생 생활을 버리고 남자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강향란의 말이 단발 자체에 못지않게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의 남성화는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후 잠깐 동안의 일본 유학 생활을 거친 뒤, 1923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이때 오스키 사카에[大衫榮],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등 일본의 대표적인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소지하고 있었다. 1922년 3월 서울에서 출범한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무산자동맹회에 참가했다가 간부인 김한(金翰)이 1923년 1월 검거되자 활동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부산에서 어떤 신문사의 지국 기자로 붓을 들기도 하였고, 1926년에는 상하이에서 알게 된 배우 정기탁과의 인연으로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27년 여성 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 가입하였다. 1928년 근우회 경성지회가 출범하자, 2년 동안 서무부원, 선전부원의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근우회 전국대회 준비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