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희는 일제강점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운영한 여성 의사이다. 1923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실을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였다. 1924년부터는 동대문여성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로제타 셔우드 홀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33년에는 강습소의 운영권을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7년 근우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평안북도 의주이다. 이명은 길멱석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구한말 정3품 관직을 지낸 할아버지 길인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2녀 1남 중 둘째인데, 언니는 일찍 결혼해서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남동생은 요절하였다. 1925년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탁원(金鐸遠)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양정소학교와 진명여학교를 거쳐 1918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실을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였다. 1924년부터는 동대문여성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27년에는 남편인 김탁원과 함께 서소문에서 한성병원을 개원하였다.
1927년 4월 26일 서울에서 근우회 발기총회가 열릴 때 차미리사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9년 4월 열린 근우회 경성지회 정기대회에서는 검사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29년 12월에는 『중외일보』가 주최한 가정부인문제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한편, 길정희는 도쿄 유학생 시절 조선 여성 의료를 위해 헌신하던 미국인 여성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을 만났다. 그녀는 길정희에게 졸업 후에 조선에서 여성 의사 양성에 힘쓰자는 제안을 하였고, 길정희도 이를 받아들였다. 홀과 한 약속은 1928년 5월 조선여자의학강습소 개소로 결실을 맺었다. 소장은 홀이 맡았고, 길정희는 부소장이 되었다. 창신동에서 문을 연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비용은 모두 사재로 충당하였고, 강사는 저명한 조선인 의사들을 무보수로 초빙하였다. 첫 입학생은 15명이었다. 이 가운데 1931년 봄에 졸업한 6명이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해 의사가 되었다.
1933년 9월 홀이 선교사를 은퇴한 뒤에는 강습소의 운영권을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5년 강습소를 관철동으로 옮겨 2층은 강습소로, 1층은 부속병원으로 운영하였다. 1934년부터 강습소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 강습소를 흡수하는 형태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1938년 4월 문을 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길정희 부부는 학교 운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부터는 한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조선여자국민당에서 위생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에는 모자 보건을 위해 조직된 서울보건부인회에서 활동하였다.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990년 사망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여성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여성 의학 전문 교육 기관 설립의 선구자였다. 남편 김탁원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981년에 『나의 자서전: 한국여자의학교육 회고』[삼호출판사]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해방 이후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학교로 바뀌었다. 우석대학교를 합병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은 1980년 길정희 장학금을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