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