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잡지는 1913년 4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총 48호가 발간된 『신문계(新文界)』의 후속으로 발간되었다. 『반도시론』은 일본 도쿄(東京)에 본사를 두고 서울 수창동에 사무실을 갖고 있던 반도시론사에 의해 간행되었다. 반도시론사 사장은 1910년대 서울에서 『신문세계(新文世界)』,『우리의 가정』등의 잡지를 발간했던 다케우치〔竹內錄之助〕였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우에노 쇼키치〔上野政吉〕였다. 집필진으로는 주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관리들이 많은 활약을 했고, 조선인으로는 이중화(李重華)·백대진(白大鎭)·최찬식(崔讚植)·최영년(崔永年)·윤희구(尹喜求)·정만조(鄭萬朝)·이돈화(李敦化)·장두철(張斗徹)·강매(姜邁)·김병로(金炳魯)·이종린(李鍾麟)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발간 초창기에는 주로 일본인 관리들의 글이 주를 이루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조선인 집필자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특징이 보인다.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반도시론의 발간과 오인의 주장」)에 따르면 「반도시론」을 창간한 이유는 “명의상이나 실행 상에 당당한 제국신민인 반도 동포는 지식을 세계에 구하고 실력을 양성해야 하는데 이러한 중부(重負)를 원조하고 박식(博識)을 애호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지도할 사명을 갖고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당시 일본인들의 이른바 ‘조선문명개화론’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창간호의 서두에는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의 무신조서(戊申詔書)가 실려 있다. 사설은 새로 부임하는 총독에 대한 환영사(「하세가와〔長谷川〕 신총독을 영(迎)함」)이고 발간 축사는 조선총독부 편집과장인 오다〔小田省吾〕가 집필했다.
제2호부터는 새로이 유학생 소식과 소설 등의 문예물이 실리기 시작했으며 제3호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공업과 농업에 관한 견해들이 실렸다. 물론 『반도시론』에는 산업문제 뿐만 아니라 교육·종교·부인·예술문제 등을 다룬 논설과 기사들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제7호부터는 지역단위로 현황을 소개하는 특집을 게재하였다.
1918년에 들어오면서 『반도시론』은 조선인 필진이 점차 많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일선동화(日鮮同化)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사설도 자주 등장하였다. 1919년 3·1운동 발발 직후에 나온 제25호에는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이 실리기도 했으나 이 제25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반도시론』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선전하고 적극 옹호하는 등 친일적 성격이 농후한 잡지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