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동맹단 조직을 위한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15년 가을일본 도쿄에서였다. 명치대학 전문부에 수학하던 최익준(崔益俊)과 외국어학교의 하상연(河相衍)이 김철수(金綴洙)를 찾아와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반제국주의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했음을 전하고 동참을 권유한 것이다. 김철수는 이미 윤현진·정노식·장덕수·김효석·전익지(全翼之) 등과 조직한 정치결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제의를 수락하고 최익준, 하상연과 함께 동경의 중국 기독교청년회에서 황지에〔黃覺, 일명 황제민 黃介民〕·덩지에민〔鄧潔民〕·펑화룽〔彭華榮〕 등을 만났다.
수일 후 한국 쪽에서 이미 결성한 정치결사를 중심으로 중국·타이완·베트남 출신의 유학생 30여 명이 모여 아시아 제 민족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할 결사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1916년 동경 간다구〔神田區〕의 한 중국음식점에 모여 ‘신아동맹단(당)’을 결성했다.
신아동맹단을 결성하는 모임에는 앞에서 거명된 이들 외에 윤홍균·김효석·현익수 등도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의 황제민은 모임의 대표로서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했다. 신아동맹단의 명칭도 이러한 취지에서 지어졌다. 이들은 목적의 수행을 위해 모든 아시아의 약소민족으로서 회원을 확대할 것을 결의했으며, “일본제국주의 타파와 서로 도움과 민족평등과 국제평등” 등을 자신들의 강령으로 삼았다.
신아동맹단에 참여했던 중국인들도 도쿄에서의 학업이 끝난 뒤 활동의 근거지를 중국 상하이〔上海〕로 옮겨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한 후 국민당 및 한국인 민족운동자들과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한국인 단원들도 국내외에서 각 방면으로 연락하며 “중국에서 폭발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아동맹단의 조선지부는 3·1운동을 계기로 조선 국내에서는 사실상 처음 등장하는 사회주의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즉 1920년 6월신아동맹단은 서울에서 제5차대회를 열고 조직의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꿈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