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경주(慶州).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신목왕후(神穆王后)는 내물왕의 8세손이자 김춘추의 사위인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이다. 681년(신문왕 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사건으로 그 딸이었던 신문왕의 왕비가 출궁되니, 683년에 간택되어 신문왕의 계비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목왕후와 신문왕의 혼인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혼인의 기일을 정하였다. 다음으로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낸 것이 비단이 15수레이고,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5월 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맞아들였는데, 왕궁의 북문에서 수레에 내려 입궁하게 하였다.
신목왕후의 혼인은 중국식으로 거행된 최초의 왕실 혼례로서, 이는 유교적 이념의 확산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구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이때의 혼인의례가 중국 황제의 친영의례인 ‘명사봉영례(命使奉迎禮)’를 적용하고 있어 신라가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대등하게 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문왕과 신목왕후의 혼인은 고종남매간의 근친혼으로서 태종무열왕계의 중대 왕실이 결집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692년(신문왕 12)에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니 태자인 김이홍(金理洪)이 효소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소왕은 687년생이니 692년 즉위 당시 6세였다. 어린 아들의 즉위로 신목왕후는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태후는 효소왕과 황복사 석탑을 조성하였다. 효소왕이 702년(효소왕 11) 16세의 나이로 사망하니 동모제(同母弟)인 김흥광(金興光)이 성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뒤에 사리와 불상·다라니를 황복사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 따르면, 태후는 700년(효소왕 9) 6월 1일 사망하였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태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문무(文武) 4년 11월 임오조(壬午條)에 “(신라에서 일본에) 살찬(薩飡) 김소모(金所毛)를 보내어 모왕(母王)의 죽음을 알려왔다”는 기사가 나타난다.
신목왕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전제왕권을 구축해가던 시기에 신문왕의 계비가 되었다.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져 탑을 조성하였으며, 일본에서 ‘모왕’이라 호칭할 만큼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