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은 기록에 의하면 국가적 방범 시책으로 세조 11년인 1465년에 처음 한성에 설치하면서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지명인 이문동(里門洞), 이문리(里門里), 이문골, 이문거리, 이문안, 이문내, 이문고개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과 곡성군 옥과면의 이문리,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이문골,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좌항리의 이문거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문은 물리적으로 주로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는 곳이지만, 민속 신앙적인 관념에 근거하여 외부의 잡귀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세운 장승, 입석, 솟대 등의 인공물이 세워진 곳으로도 확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도로변 혹은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고, 입석은 마을 입구나 마을 주변에 많이 세우며, 솟대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주로 마을 입구에 세우는 등 모두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민속 신앙적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입구가 인간들의 출입구인 것처럼 그곳은 모든 신들의 출입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을의 출입구 방향이 좋지 않은 경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형물을 세운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조형물이 외부의 침입을 막고 마을과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문을 정치적인 관념에서 종교적인 관념으로도 확장시킬 수 있다. 마을이나 고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장승, 입석, 솟대, 해태상 등이 이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문이 단순히 지명에 남아 있는 통치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