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진관은 1921년 5월 21일 여성사진사 이홍경(李弘敬)이 남편 채상묵(蔡尙黙)의 도움을 받아 서울 종로구 관철동 75번지에 개설한 사진관이다. 1920년대는 초상사진의 대중화와 맞물려 조선인 사진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지만, 부인사진관이 개설된 1921년은 조선인 사진사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숫자가 미미했다. 이런 점에서 이홍경의 사진관 개설은 시기적으로도 앞섰는데, 조선인 및 일본인 남성 위주의 사진업계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인 여성이 관주(館主)인 사진관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사진 실력도 뛰어나 개업한 지 10개월 만에 사진관 건물을 2층으로 증축 · 확장했으며, 제반 설비도 확충했을 정도로 사진관의 규모가 커졌다.
부인사진관 앞에는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으로 알려진 우미관(優美館)이 있었는데, 영화 관람객으로 붐비는 극장 앞에 사진관을 열었다는 것은 고객의 수요를 고려한 입지 선정이었다. 또한 사진관 이름에 ‘부인’이라고 붙인 것은 ‘여성 전용 사진관’이라는 의미보다는 ‘여성이 운영하는 사진관’임을 내세운 것으로, 이는 여성 고객 유치를 고려한 작명이었다. 즉 사진관의 입장에선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잠재적인 고객으로 유입시킬 필요가 있는데, 1920년대까지만 해도 내외법이 잔존했기 때문에 관주가 여성이었던 부인사진관이 남성 사진관보다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홍경의 신상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서울에서 직업 초상화가로 활동하던 채상묵의 후실로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다. 채상묵은 개항기의 대표적인 초상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셋째 아들이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한 미술연구회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 후 귀국하여 서대문정 1정목[현 신문로 1가]에 영업장을 개설하여 직업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유학 당시 사진술을 배웠으며, 초상화 제작에 사진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홍경은 남편 채상묵에게 사진술을 전수받았으며, 1918년부터 3년간 사진술을 연마한 끝에 1921년 비로소 사진관을 개설했던 것이다.
이홍경은 1924년 ‘부인사진관’의 이름을 ‘조선사진관(朝鮮寫眞館)’으로 개칭했는데, 이는 남편 채상묵이 초상화가에서 초상사진사로 전업하면서 부부가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홍경은 상호 변경을 위해 조선사진관의 등기를 본인 이름으로 했지만, 1924년 7월 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채상묵 관련 기사를 보면 그를 ‘조선사진관 주인’으로 소개하고 있어 실질적인 관주는 채상묵이 맡았다.
조선사진관은 부부가 공동 운영하면서 사업 규모가 확장되었는데, 먼저 그해 9월 조선사진실습회(朝鮮寫眞實習會)를 열고 사진실습생 모집에 나섰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진교육 차원에서 개설한 것이지만, 사진관 확장에 따라 필요한 인력[사진조수]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보인다. 결국 11월에는 종로1정목 42번지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조선사진관 종로출장소’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1926년 3월경 돌연 성업 중이던 조선사진관을 사진사 이완근에게 양도하고, 인사동 132번지로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京城寫眞館)’이라는 새로운 사진관을 개설하고 영업을 이어갔다.
1921년 개설된 부인사진관은 처음에는 이홍경에 의해 단독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남편 채상묵이 합류하면서 조선사진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동 운영되었으며, 1926년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이란 이름으로 거듭났다. 부인사진관은 비록 그 운영 시기는 짧았지만 관주가 여성인 유일한 조선인 사진관이었으며, 관명과 위치를 바꿔가며 1920년대 초상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조선인 사진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