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구(學究)라고도 한다. 훈장은 한문이 들어오면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서당교육이 활발해진 조선 중기 이후에 널리 일반화되었다.
자격은 천차만별이었으며, 학식의 표준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한 자는 드물었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도 열악하였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학문의 정도는 경전의 주석과 언해를 보고 그들의 뜻을 대강 해득할 수 있을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벽촌의 훈장 가운데에는 한자문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도망한 노예가 법망을 피하는 수단으로 훈장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글짓기로는 표(表)·책(策)·기(記)·명(銘)을 짓고 시(詩)와 율(律)을 이해하는 자는 드물었으며, 겨우 사율(四律)을 빌려 옮기거나 십팔구시(十八九詩) 따위를 한두마디 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름난 고관이나 학자들이 만년에 자연을 벗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훈장이 받는 보수는 매우 빈약하여서 양식이나 땔나무를 조달받거나, 계절에 따른 별식을 공궤받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학생을 교육하는 일 이외에 마을의 대서(代書)를 전담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