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제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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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장 / 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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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제도
수공업적 기능의 후계자를 양성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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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수공업적 기능의 후계자를 양성하는 제도.
내용

도제제도는 유럽 중세도시의 상인이나 수공업자의 동업조합이었던 길드(guild) 내부에서 후계자 양성을 위한 기술적 훈련의 실시와 더불어 동업자간의 경제적 독점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제도였다. 이러한 동업조합에서는 상점 주인이나 독립된 장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도제에서 출발하여 직인(職人)의 단계를 거쳐 장인(匠人)으로 승격되는 3단계를 밟도록 되어 있었다. 도제란 이러한 과정의 첫 단계이며, 그 기간은 직종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대체로 연기계약(年期契約)에 의거하여 주인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직업상 필요한 인격적 교육과 기능의 습득에 종사하였다. 정해진 수습기간을 끝낸 직인은 제작품을 제출하고, 이것이 통과되어야 동업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유럽의 도제제도는 법률이나 동업조합 규정 등에서 장인에게 허용된 도제의 수를 비롯하여 수련기간 등에 관해 많은 규제를 두었으며, 직인이 아들에게 직업을 세습적으로 계승시키는 데 따른 특혜나 예외조항도 두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도 동업조합과 도제제도가 존재하였으나, 유럽과는 사회적 조건이 달라서 그 운영 방법이나 후계자 확보 방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실업교육은 지식이나 실무를 습득하려는 자가 장인이나 직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술을 배운다거나 장부를 정리하고 화물을 꾸리고, 제품이나 상품을 감정할 수 있는 능력을 하급단계에서부터 체득하였다. 따라서 전통사회의 기능은 비전적(秘傳的)으로 전래되는 성격을 지녔다. 도제로서 영입된다는 것은 생업을 이어갈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포함된다는 뜻을 가지는 것이었고, 특정업무가 세습적으로 특정 집단원에게만 전수되도록 제약된 직종도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도제제도는 대체로 가족과 결합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가족 경영주의적·온정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장하고 유지시키는 구실도 하였다. 우리 전통사회의 도제제도는 특수기술직·수공업·상업 분야에서 대표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선시대의 특수기술직인 의학·역학·천문학·음악 등의 분야에서는 그 생도선발에 대하여 “해당의 생도 이외에는 응시를 불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그 나름대로의 전습제도가 짜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장악원(掌樂院)의 악생(樂生)이나 악공(樂工) 선발에 규정된 과목이나 그 수준으로 보아 이들의 양성과정은 문외한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면에서, 대체로 세습적인 전수형태였다.

한편 전통사회의 궁정이나 관수물자(官需物資)를 중심으로 한 모든 생산과 조달은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관부에 예속된 관장(官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공장(工匠)은 그 출신이 하천민이어서 지위가 매우 낮았다. 하지만 이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은 국가에 매우 긴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방임하여 기술이 거칠어지거나 단절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각 관아의 일반노예가 공장으로 편입된 경우도 많아서 노비신분으로 그 신역(身役)을 지는 방법으로 기술계통에서 여러 작업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개 나이가 어릴 때부터 공장으로 편입되어 기술을 습득하였다. 때로는 직종에 따라 사습자(私習者)가 없어서 각 관아의 나이 어린 노자(奴子)로써 충당시켜 기술을 교습하고 기성공장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보충하도록 하였다.

1426년(세종 8) 3월에는 각 관아의 충원요구가 너무 많아지자, 젊고 슬기로운 자를 10명 이내로 뽑아 도제를 만들자는 형조(刑曹)의 건의를 왕이 받아들여 중앙관아소속과 지방에서 올리는 노비들이 주로 보충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조역(助役)으로 사역되면서 자연히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고, 잘하면 공장으로 승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가 중심이었던 충원제도를 1434년에 이르러서는 점차로 양인 출신의 기술인으로 충당시킴으로써, 마지못해 일해야 하는 노비보다는 작업능률이나 제작에 정성을 기울이는 면에서 양인공장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적(匠籍)에 등록된 전문적 수공업자로서 특정 직종분야를 독점 내지 계승했던 그들은 각자의 거주지에 따라 서울 거주자는 경공장(京工匠)으로, 지방 거주자는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누어졌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공장은 공조(工曹)에 소속되며 129직종 2,841명이 각 부서에 배속되었고, 외공장은 27직종 3,656명의 정원으로 나타나 있다.

전근대사회 대부분의 직업분야가 세습제를 답습했듯이, 공장의 경우도 긴요한 종목의 장인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옹원(司饔院) 사기장인(沙器匠人)의 아들은 다른 일에 취역시킬 수 없다”라고 『속대전』 공장조(工匠條)에는 취역계승을 규정하였다. 또한 장인의 노비 소생의 아들도 아버지를 따르도록 세습적 도제제도를 강제하였다. 『대전회통』공장조에서는 “미성(未成)의 재인(才人)은 전습의 기한을 정하되, 근면하지 못한 자는 훈회장인(訓誨匠人)과 위령률(衛令律)로써 논죄한다.”는 등의 타율적·강제적 조처로써 도제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관장제적 공장제가 격감 내지 재개편되었다. 그 까닭은 공장의 대부분이 관영활동에 관련되어 제작활동이 창의적이기보다는 타의에 의한 취역이었으므로 자연히 그 기술은 관료제적인 한계성을 극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관장제의 붕괴 및 재개편은 사장(私匠)의 대두로 이어졌다. 사장도 관장과 마찬가지로 세습에 의하여 직업을 이어갔던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기술의 전수도 대체로 혈연성에 입각하여 행해졌다. 물론 국가의 법률이 사장에게도 강제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 혈연이 중요하던 전통시대에는 그와 같은 직업의 세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기점(沙器店)의 장인들도 가족과 가까운 혈족으로 이루어졌던 점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민간수공업은 가업(家業)의 수준에 불과하였으므로 경영규모도 약소할 뿐만 아니라 기술수준도 낮았다. 따라서 가족 외의 노동력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에 따라 기술전수는 소수 혈연자에 국한되어 장시간에 걸쳐 비체계적으로 약간씩 이루어졌으며, 제도화되고 공인된 기술숙련의 단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주전(鑄錢)·시전(市廛) 장인들의 계(契)규약에서 그와 같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직업의 세습혈족간의 기술전수는 민간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성격을 달리해 갔다고 생각된다. 수공업의 규모가 확대되면 한정된 혈족만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비혈연자를 어렸을 때부터 고용하고 교육시켰다.

19세기 말에는 공장제 수공업단계까지 도달하였던 유기(鍮器)·주전(鑄錢)·솥계와 같은 금속제조업에서는 기술전수의 비혈연적 성격이 강하였다. 평안도 상원(祥原)의 한 유기점의 기술자들은 모두 성(姓)이 달랐고, 청도(淸道) 솥계의 경우 한 편수가 이성(異姓)의 편수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배웠다고 하는 사례도 있다.

개항 후, 특히 갑오경장 이후에는 각종 계가 혁파되고 근대적 제조업체와 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장인·조역의 관계와 관습에 입각한 기술전수는 쉽게 없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산업의 발전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기술학교 졸업생 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전래의 사회적 관계가 강인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상업분야에서는, 서울의 궁부와 관부에의 납품, 중국에 보내는 세폐(歲幣)의 조달 등에서 일종의 어용독점상인으로서의 전매권을 가졌던 상단(商團)인 육의전(六矣廛)은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구성, 조합원인 도원(都員)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가문을 보존하는 도리에 힘쓰게 하며, 연장자를 존경하고 아랫사람에게 너그러운 기풍을 배양함으로써 가업을 계승시키고 실익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도중에는 도원의 증손대까지 세습적 가입자격이 주어졌으며, 아들과 사위는 동일자격이었고, 외손(外孫)은 진손(眞孫)에 비하여 차등을 두었으나 경시되지는 않았다. 연고자는 아니더라도 어려서부터 사역, 양육되어온 아동출시(兒童出市)의 경우에도 도제로서 혈연자와 동격으로 대우한 것으로 미루어, 전문상인으로서의 수련을 거치면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했다.

개성에 있었던 상인조직인 송방(松房)에서는 후계자 훈련도 엄격해서 유럽의 길드에서와 같은 종제제도(從弟制度)를 적용하였다. 개성상인은 전문경영자, 이른바 차인(差人)을 만들기 위하여 10년간을 한 집에서 고용생활을 거치도록 하였다. 가게 청소에서 시작하는 생활훈련은 엄격한 주종관계를 지켜야 했다. 주인이 잠을 자야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상품을 진열해야 했다. 송방은 전국적인 유통구조를 계열화하였으며, 동업조합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일을 배우는 수련과정을 필수화함으로써, 역자로 들어간 경우에도 다른 고용인과 같이 생활하도록 하였다. 일단 일정한 수련기간을 견디고 차인으로 인정되면 대우가 달라졌고 급료가 올랐으며, 그 액수는 몇년만 일하면 자립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훈련을 거친 뒤 아들인 경우에는 가업을 물려줌으로써 고객을 잃지 않고 종업원을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의 상업활동은 근대적 산업사회로 발돋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해도, 지역이나 분야에 따라서는 그 나름대로의 조직성·교육성이 자체적으로 충분히 가능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가치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의거한 직업관과 상공업을 억제하였던 정책적 풍토 등으로 말미암아, 각 분야 직종별로 사회 혹은 국가가 공인하고 권장한 도제제도는 제도로서 정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자기방어와 계승의 면에 있어서도 유럽의 도제제도와는 달리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럽의 도제제도가 길드를 통해 생산․분배 등의 통제라는 경제적 측면과 자치도시의 행정이라는 정치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데 반해, 조선의 도제제도는 경제적 측면에만 관련된 제도로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大典會通』
『續大典』
『한국기술교육사』(이원호, 서문당, 1974)
『인간문화재』(예용해, 어문각, 1969)
「무형문화재의 도제제도에서 나타난 상황 학습에 대한 고찰」(안주영, 『중앙민속학』 제14호, 2009)
「중세시대 도제제도의 교육적 특징에 관한 연구」(장석민, 『직업교육연구』 제4권 1호, 1985)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류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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