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 교남서화회로도 불린다. 대구에서 활약한 서화가 서병오가 서화 교류와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1922년 1월에 개설했으며 연구생들을 지도하여 영남 지역 서화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서화교육(강습소) 외에 서화전람회와 강연희를 개최하고, 도서관(서화를 전시하는 상설관을 의미함) 설립운동을 목적으로 했으며, 대구 영남 지역의 서화 애호가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회장은 서병오, 부회장에 박기돈(朴基敦), 강사는 정용기(鄭龍基)·서병주(徐丙柱)였고, 총무는 이영면(李英勉)·김재환(金在煥), 이사는 김홍기(金洪基), 회계는 서창규(徐昌圭)가 맡았다.
설립자 서병오는 1901년 즈음에 중국 상하이에서 민영익을 만나 친분을 쌓고 상해파(上海派) 화가인 포화(蒲華), 오창석(吳昌碩) 등과 교류하며 이들의 문인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사군자와 행서에 뛰어났던 서병오는 1922년에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개설한 후 연구생들을 교육시켜 배효원(裵孝源), 서동균(徐東均), 서창규, 서병주, 김응섭(金應燮), 김진만(金鎭萬) 등을 배출했다. 시인 이육사도 한때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2년 5월에 회원들의 첫 전람회가 열렸고, 1923년 11월에는 더욱 규모를 확장하여 대구미술전람회로 열렸다. 서병오는 제1회(1922)부터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이 되면서 대구 지역 서화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교남시서화연구회 소속의 배효원, 서동균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등단했다.
교남시서화연구회는 1932년에 10주년 기념전람회를 열었으며, 1933년에도 ‘서화즉매회(書畵卽賣會)’를 열어 수익금을 영남 수재민 돕기에 내는 등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서병오의 사후에는 제자 서동균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으며, 해방 후 1953년에 교남서화회(嶠南書畵會)를 영남서화회(嶺南書畵會)으로 개칭한 후 계속해서 영남 지역 서화계의 맥을 이었다.
처음부터 후진 양성과 전람회 개최를 목적으로 한 교남시서화연구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 일대뿐 아니라 서울과 타지방의 화가들과의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도 했다. 회원들의 전람회는 양화부와 고서화부도 포함되어 있어서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또한 대구화단과 경주, 안동, 서울, 광주, 전주, 평양, 개성 등에서 활약하는 서화가들이 참여할 정도로 지방화단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돈희, 김규진, 고희동, 김용진, 오세창, 이도영, 심인섭, 황성하, 황용하, 김윤보, 김석범, 김유택, 허백련, 정운면 등이 교남시서화연구회에서 교류한 서화가들이다. 이재민을 위한 서화즉매회를 열 만큼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