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묵당은 지금의 당주동에 있었으며, 첫 제자로 이도영을 받아들였다. 개설 시점은 1918년 6월에 ‘경묵당 창립기념회’를 열었다는 신문기사에 의해 1901년경이 아닌 1918년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1899년에 상해를 거쳐 1900년부터 1901년 사이 일본을 다녀온 직후가 더 타당할 듯하다. 경묵은 안중식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때에 그린 「매처학자도(梅妻鶴子圖)」(1900년)에 ‘경묵용자(耕墨傭子)’라는 호를 쓴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며, 먹을 갈아 품팔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개설 직후에 가장 먼저 이도영(李道榮)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처음부터 서화교육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외에 고희동(高羲東)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에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경묵당을 개설한 후 안중식은 1902년에 고종 어진도사의 주관화사로 발탁되어 어진을 그린 공으로 통진군수(通津郡守)와 양천군수(陽川郡守)를 지냈기 때문에 관직을 그만 둔 후 1907년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에 윤영기(尹永基)에 의해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가 발족되자 안중식은 이곳의 교수가 되었고, 경묵당에서의 서화교육은 서화미술회로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안중식의 사저에 경묵당은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던 듯하다. 이상범(李象範)과 노수현(盧壽鉉)은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후에도 이 경묵당에서 숙식을 하며 수업을 계속 받았다고 한다.
경묵당이란 당호는 안중식의 사후에 1920년경부터 서예가 안종원(安鍾元)이 계속해서 사용했다.
경묵당 화실은 교육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 세도가, 선비,미술애호가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평생지기였던 조석진을 비롯해서, 권동진⋅오세창⋅안종원⋅김응원⋅나수연⋅박기양⋅김가진⋅김창유⋅김석진 등이 이곳에서 서화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