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김규진이 1920년에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부벽화이다. 2006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1917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그려졌다. 이 벽화는 희정당의 서쪽 벽면 위쪽에 금강산 만물상의 절경을 그린 것이다. 구름에 싸인 금강산의 단풍 든 가을 정경이 신비롭고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가로 길이가 880㎝나 되는 대작이다. 관념적인 수묵산수가 유행하던 당시에 이런 실경산수는 기념비적이다. 김규진은 이 그림 외에 희정당 동쪽 벽의 「총석정절경도」도 있다.
2006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95㎝, 가로 880㎝. 김규진(金圭鎭)이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서쪽 벽면 위쪽(상인방에 해당함)에 그린 부벽화(비단과 종이에 그려 벽에 붙인 그림)로, 금강산 만물상의 빼어난 절경을 그린 것이다. 황실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희정당의 내부에 벽화가 그려지게 것은 1917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희정당을 재건할 때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에서 부재들을 가져오는 어처구니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1920년에 재건된 희정당은 옛 모습을 완전히 잃었고, 뒤편에 대조전과 경훈각이 이어지도록 복도를 설치함으로써 일본의 궁궐 건축 양식을 보여주었다. 창덕궁의 희정당 외에 대조전(大造殿)에도 같은 시기에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 화가인 이용우(李用雨)와 오일영(吳一英), 김은호(金殷鎬)가 각각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를 부벽화로 그렸다. 경훈각에는 역시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 화가였던 노수현과 이상범이 각각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와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를 그려 창덕궁 벽화는 모두 총 6점이 제작되었다.
이 벽화를 장식하는 사업은 원래 일본인 화가들에게 맡겨질 뻔했지만 순종의 적극적인 반대로 한국 화가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대한제국 황실은 3,0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윤필료를 주고 당대 화단을 대표하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의 김규진과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김응원에게 맡겼다. 이때 서화미술회는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안중식, 조석진 등이 이미 작고한 뒤여서 그들의 제자들인 젊은 화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 벽화사업은 윤필료에 얽힌 추문이 나돌아 신문의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 등 일반인들의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가로 길이가 880㎝나 되는 대작으로 화가 김규진에게는 물론 한국근대회화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주로 관념적인 수묵산수가 유행하던 당시 화단에서 더욱이 주로 사군자류의 그림을 그렸던 김규진이 진채의 실경산수를 시도했던 것은 자신에게도 큰 도전이고 모험이었을 듯하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 가로로 “금강산만물초승경(金剛山萬物肖勝景)”이라 썼는데 「총석정절경도」에만 끝에 “김규진 근사(金圭鎭 謹寫)”라고 쓴 것을 보면 두 폭을 한 쌍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6점의 벽화 중에서 김규진이 맡았던 희정당 벽화가 가장 큰 규모였고, 혼자서 2폭을 모두 그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회심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특혜가 주어진 것은 그가 서화연구회의 대표이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이었다는 인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금강산과 총석정을 소재로 그린 것은 순종의 명일 가능성이 크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19년 가을(10월 28일~12월 8일)에 김규진은 금강산을 다녀왔는데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가을 장면인 것은 이때의 사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1920년 초여름에는 희정당 벽화를 그리기 전에 다시 한번 금강산과 총석정을 다녀왔다. 이때의 사생을 바탕으로 단풍이 든 금강산의 만물상 정경을 정치한 필치로 성실하게 그려냈고, 겹겹이 에워싼 구름이 화면의 웅장함을 더해준다. 가로로 긴 공간을 생각해서 실재 광경보다는 훨씬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나열하였고, 진채(眞彩)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희정당은 국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便殿)으로 중앙 대청의 동서 벽면의 상단 부분(보통 상인방이라 부름)에 이 부벽화를 설치했다. 전통적으로 이곳에는 그림을 장식하지 않았지만 변형되어 재건된 희정당에는 벽화가 장식되었던 것이다. 순종은 자신의 집무 공간인 이곳에 민족의 영산이며, 정기를 보여주는 총석정과 금강산으로 장식되길 바랬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