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석정절경도」는 김규진이 1920년에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부벽화이다.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재건된 건물의 벽화 장식을 김규진(1868-1933)이 맡았다. 순종의 명에 의해 당시 화단의 중진인 김규진이 희정당 벽에 「총석정절경도」를 그렸다. 「총석정절경도」는 가로 길이가 880㎝나 되는 대작이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총석정의 절경을 청록산수 기법으로 파노라믹하게 표현하였다. 관념적인 수묵산수가 유행하던 당시 화단에서 실경산수를 시도한 예이다. 「총석정절경도」는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2006년 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95㎝, 가로 880㎝. 창덕궁 희정당 내의 서쪽 벽면에 그려져 있다. 이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는 마주보는 동쪽 벽면에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와 함께 창덕궁 희정당을 장식하고 있는 부벽화(付壁畵)이다.
1917년 창덕궁의 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된 대화재 이후 재건된 건물에 벽화를 장식하는 사업은 원래 일본인 화가들에게 맡겨질 뻔했지만 순종의 적극적인 반대로 한국 화가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대한제국 황실은 3,0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윤필료를 주고 당대 화단을 대표하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의 김규진과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김응원에게 맡겼다. 이때 서화미술회는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안중식, 조석진 등이 이미 작고한 뒤여서 그들의 제자들인 젊은 화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 벽화사업은 윤필료에 얽힌 추문이 나돌아 신문의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 등 일반인들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총석정절경도」는 가로 길이가 880㎝나 되는 대작으로 화가 김규진에게는 물론 한국근대회화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주로 관념적인 수묵산수가 유행하던 당시 화단에서 더욱이 주로 사군자류의 그림을 그렸던 김규진이 진채의 실경산수를 시도했던 것은 자신에게도 큰 도전이고 모험이었을 듯하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라 쓰고 이와 수직 방향으로 “김규진 근사(金圭鎭 謹寫)”라고 썼다.
같은 시기에 희정당 외에 대조전(大造殿)에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 화가인 이용우(李用雨)와 오일영(吳一英), 김은호(金殷鎬)가 각각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를 부벽화로 그렸다. 그리고 경훈각에도 역시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 화가였던 노수현과 이상범이 각각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와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를 그려 창덕궁 벽화는 모두 총 6점이 제작되었다.
창덕궁 희정당의 뒤편에 대조전이 이어지고, 그 뒤에 다시 경훈각이 이어지도록 하여 효율적인 동선을 가졌는데, 이러한 건물 구조는 한국의 궁궐에는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일본의 궁궐 건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규진이 맡았던 희정당 벽화가 가장 큰 규모였고, 혼자서 2폭을 모두 그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회심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특혜가 주어진 것은 그가 서화연구회의 대표이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이었다는 인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가 금강산과 총석정을 소재로 그린 것은 순종의 명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김규진은 순종의 명으로 금강산을 직접 가서 사생했는데, 바다에서 총석정을 본 광경도 참고했겠지만 실재 그림에서는 이를 훨씬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나열하여 진채(眞彩)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희정당은 국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便殿)으로 중앙 대청의 동서 벽면의 상단 부분(보통 상인방이라 부름)에 이 부벽화를 설치했다. 전통적으로 이곳에는 그림을 장식하지 않았지만 변형되어 재건된 희정당에는 벽화가 장식되었던 것이다. 순종은 자신의 집무공간인 이곳이 민족의 영산이며, 정기를 보여주는 총석정과 금강산으로 장식되길 바랬던 듯하다.
화면 가장 좌측 상단 부분의 비단이 찢겨져 있었고 2010년 1월에 소방 설비를 설치하던 중 인부의 실수로 왼쪽 가장자리 부분이 6㎝ 정도 찢기는 사고가 있어 보완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