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진 ()

노안도/조석진
노안도/조석진
회화
인물
근대, 1세대 동양화가를 배출한 미술 교육자이자, 전통시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한 화가.
이칭
응삼(應三)
소림(小琳)
초명
태원(台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3년
사망 연도
1920년
본관
함안(咸安)
출생지
황해도 웅진
주요 작품
고종어진
주요 관직
장례원 주사|영춘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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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석진은 근대 1세대 동양화가를 배출한 미술 교육자이자, 전통시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한 화가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조정규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19세기 말부터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서화미술회 교수, 서화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안중식과 함께 최초의 중국 유학생으로 신문물을 경험한 개화 지식인이었으며, 조선 말기와 근대 화단을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목차
정의
근대, 1세대 동양화가를 배출한 미술 교육자이자, 전통시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한 화가.
인적사항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초명은 태원(台源)이고, 자는 응삼(應三), 호는 소림(小琳)이다. 아버지 조용찬(趙鏞燦)과 어머니 문의 박씨(文義 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요 활동

어린 시절 황해도 옹진에서 도화서 화원으로 산수화와 어해화(魚蟹畫)를 잘 그린 할아버지 임전(琳田) 조정규(趙廷奎)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소림’이라는 호는 '작은 임전'이라는 의미로, 조정규의 화풍을 계승했음을 알려준다.

1880년경 혜민서 주부였던 조성완(趙性完)의 양자로 한양에 오면서 중앙 화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가장 이른 공식 활동은 1881년 신무기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한 제도사(製圖士)로 선발되어 영선사 일원으로 청나라 톈진[天津]에 파견된 것이다. 이때 남국화도창(南局畵圖廠)에서 안중식과 함께 기계 구조와 제도, 한문 등을 배우며 평생지기가 되었다. 1882년 11월 귀국한 이후 1883년 화폐 주조를 위해 설치된 전환국(典圜局) 사사(司事)로 근무하다가, 1887년에 근대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機器局) 위원(委員)으로 옮겨 갔다.

1890년대부터 화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데, 1894년 갑오개혁을 추진한 군국기무소의 회의 장면을 그린 기록화가 현전하고 있다. 창덕궁 내 선원전(璿源殿) 영건(營建) 시에 화원으로 병풍을 그리기도 했다. 채용신(蔡龍臣)과 함께 주관화사로 1900년에 태조 이성계 어진을, 1901년에 태조를 비롯한 7조(七祖) 어진을 모사하였으며, 그 공로로 장례원 주사가 되었다. 1902년에는 안중식과 함께 고종 어진과 황태자 주1을 도사(圖寫)하였으며, 이후 조석진은 영춘군수(永春郡守), 안중식은 통진군수(通津郡守)에 임명되었다.

1908년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의 강사로 촉탁되어 도자기 그림을 가르쳤으며, 같은 해 근대적 상업 화랑인 한성서화관의 전속화가로 주문 그림도 제작하였다. 1911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미술회의 교수로 임용되어, 안중식 등과 함께 이용우(李用雨) · 오일영(吳一英) · 김은호(金殷鎬) · 이상범(李象範) · 노수현(盧壽鉉) · 최우석(崔禹錫) · 박승무(朴勝武) · 변관식(卞寬植) 등 1세대 동양화가들을 배출하였다. 1916년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강사로 촉탁되어 도자기 그림을 계속 가르쳤다. 1918년 6월, 한국인 서화가로 구성된 최초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으며, 안중식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조석진은 초상 · 산수 · 인물 · 화훼 · 어해 · 기명절지 등 다양한 화목을 두루 소화하였다. 특히 두각을 나타낸 산수화와 인물화는 중국적 색채가 강한 편인데, 이는 같은 시기 상하이[上海] 지역에서 발간된 중국 화보(畵譜)들을 임모(臨摸)하였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산수화 가운데, 장웅(張熊)의 제자 소훈(巢勳)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산수편을 증보 발간하면서 주2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증광명가화보(增廣名家畵譜)」[1888]와 『화보채신(畵譜采新)』[1885] 등을 임모한 작품들이 확인된다. 도석 · 고사인물화에서는 『개자원화전』 4집 인물편의 눈과 입술을 차용한 얼굴 표현과 왕지(王墀)의 『육수당화전(毓秀堂畵傳)』[1883]에서 보이는 4등신의 신체를 절충하여 개성적 인물화풍을 완성하였다. 이밖에 인물화의 도상은 『시화방(詩畵舫)』[1879], 『시중화(詩中畵)』[1885], 『해상명인화고(海上名人畵稿)』[1885] 등의 상하이 화보에서 차용하였다.

안중식과 함께 최초의 중국 유학생으로 신문물을 경험한 개화 지식인이었으며, 서화미술회와 관립공업전습소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조선 후기와 근대 화단을 잇는 가교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논문

최경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 인물화에 보이는 해상화파 화풍」(『미술사학연구』 256, 한국미술사학회, 2007)
오행수, 「소림 조석진(1853-1920)의 인물화 연구」(고려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6)
최경현,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의 산수화에 보이는 해상화파의 영향」(『미술사논단』 15, 한국미술연구소, 2002)
주석
주1

왕세자의 화상(畫像). 우리말샘

주2

1840년대에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발달한 화파. 전통을 기반으로 외래 예술을 흡수하여 참신하고 개성이 있으며, 그림을 그리고 토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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