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세로 184㎝, 가로 526㎝. 비단 바탕에 채색.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는 노수현이 21세에 그린 것으로 창덕궁 경훈각 내의 동벽 상단(상인방에 해당함)에 장식되었다. 마주보는 서벽에는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동문이자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이상범(李象範)이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를 그렸다.
두 화가 모두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문하에서 그림을 익힌 신진 화가들로 두 작품에는 스승의 전형적인 산수화풍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 외에도 같은 동문인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가 창덕궁 대조전 동벽에 「봉황도」, 김은호(金殷鎬)가 대조전 서벽에 「백학도」를 그렸고, 서화연구회의 대표인 김규진(金圭鎭)은 홀로 희정당 동서벽에 각각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도(金剛山萬物肖勝圖)」를 그려, 총 6점이 모두 같은 해에 제작되었다.
1917년에 있었던 창덕궁 대화재 이후에 재건된 이 건물들은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변형되었고, 독립되어 있던 세 건물은 복도와 행각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이곳의 실내 벽화를 장식하는 일은 일본 화가들에게 주어질 뻔했지만 순종의 강력한 뜻에 의해 한국 화가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그림의 주제들은 모두 장소의 용도에 적절한 내용이 선택되었으며, 서로 마주보는 작품들은 음양의 조화나 내용상 관련되는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동쪽(왼쪽)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그린 「조일선관도」가 배치하였고, 반대편 서벽(오른쪽)에는 「삼선관파도」를 그려서 두 작품을 연결시키면 연폭처럼 이어진다. 「조일선관도」에는 「삼선관파도」에 비해 산이 더 진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아침 해에 그늘져 더욱 짙어진 초록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김은호를 제외하면 모두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서로의 작업을 보며 그렸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상범과 노수현이 각각 그린 두 작품 속의 소나무들은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동일한 모양과 채색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로 합작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소나무는 이상범의 양식에 더 가깝다. 또한 「조일선관도」의 날카로운 바위산은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에서도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속의 한 동자는 천도 가지를 메고 있고, 다른 동자는 연잎에 거북을 싸서 들고 있는 모습이다. 모두 장수를 상징하는 모티브들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자연과 함께 묘사되었다.
비단을 여러 겹 이어서 그림을 그리고, 액자형으로 틀을 만들어 벽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총 6점의 창덕궁 벽화는 황실이 주도가 되어 화가들에게 공식적으로 궁궐의 장식화를 의뢰한 예이다. 더욱이 세로가 2m에 가깝고, 가로 길이는 5m에서 9m에 이르는 화면의 크기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참여한 화가들이 대개 20대의 젊은 신진화가들로 이러한 대규모 작품을 그린 예는 그 전후에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기념비적인 창덕궁 벽화의 제작은 경복궁을 해체시켜 창덕궁을 재건시키고, 그조차도 심하게 변형시켜 버린 일본의 파행적 행태 속에서 그나마 한국 화가들이 내부 장식을 맡음으로써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던 예라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