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세로 184㎝, 가로 526㎝. 비단 바탕에 채색.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는 이상범이 20대 초에 그린 것으로 창덕궁 경훈각 내의 서벽 상단(상인방에 해당함)에 장식되었다. 이 작품과 마주하는 동벽에는 노수현(盧壽鉉)이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를 그렸다. 두 화가 모두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문하에서 그림을 익힌 신진 화가들이었다. 이들 외에 같은 서화미술회 출신의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가 창덕궁 대조전 동벽에 「봉황도」, 김은호(金殷鎬)가 대조전 서벽에 「백학도」를 그렸고, 서화연구회의 대표인 김규진(金圭鎭)은 홀로 희정당 동서벽에 각각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도(金剛山萬物肖勝圖)」를 그려, 총 6점이 1920년에 제작되었다. 창덕궁의 벽화 제작은 본래 일본 화가들에게 주어질 뻔했지만 순종의 강력한 뜻에 따라 한국 화가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황실은 당초에 서화연구회의 김규진과 서화미술회의 총무였던 김응원(金應元)에게 이 사업을 의뢰했다. 서화미술회 쪽에서는 강필주(姜弼周), 김은호, 고희동,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가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 5명뿐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3,000원이 넘는 넉넉한 그림값을 주었는데 이것을 분배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이들은 김은호를 제외하면 모두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서 그림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삼선관파도」는 「조일선관도」와 같이 가로가 526㎝로, 대조전과 희정당 벽화보다는 작았지만 큰 스케일의 산수도를 파노라마처럼 그린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다른 작품들과 함께 1920년 8월 초에 착수하여 9월 말에 완성되었다.
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은 김규진을 제외하면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었고 오일영과 합작한 이용우는 20살이 아직 되지 않은 19살이었으므로, 황실이 주도가 된 사업에 아직 작가적 완성기에 접어들지 않았던 신예들이 참여했던 사실은 주목된다. 스승인 안중식과 조석진의 사후에 화단의 중심이 곧바로 20대의 젊은 신진화가들에게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서화미술회의 스승이었던 김응원은 묵란도를 주로 그렸으므로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던 듯하며, 강필주는 김응원과의 불화로 인해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삼선관파도」와 「조일선관도」는 모두 중국의 전설을 청록산수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경훈각은 대조전 서북쪽과 연결되어 있으며, 본래는 2층이었으나 1920년에 재건될 때에는 단층이 되었다. 이곳은 명나라 신종에게 받은 망의를 보관하던 곳이었지만 재건될 당시에는 더위를 피하는 곳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삼선관파도」는 화면 왼쪽에 세 신선들이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로의 나이를 자랑한다는 ‘삼인문년(三人問年)’과 비슷한 내용을 그린 것이다. ‘삼인문년(三人問年)’은 북송의 문인인 소식(蘇軾)의 『동파지림(東坡志林)』에 근거한 내용을 회화화한 것이다. 한 신선은 자신이 천지를 개벽한 창조자인 반고의 친구라 하고, 두 번째 신선은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해 생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때마다 가지 하나씩을 올려 놓았던 집 한 채와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를 가리키며 나이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세 번째 신선의 나이를 상징하는 천도(天桃) 나무가 보이는데, 세 번째 신선은 3000년 만에 한 번 열매 맺는 천도를 먹고 뱉은 씨앗이 곤륜산 만큼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인 안중식, 조석진의 전형적인 산수화법을 보여주며 멀리 산이 부분 부분 붉게 물들어 「조일선관도」와 대비되는 저녁 무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