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성(徐東星)·방한상(方漢相) 등이 서로 우정을 돈독히 하고 무정부주의사상을 진지하게 연구할 목적으로 1925년 9월 조직하였다.
서동성은 1923년 동경대진재(東京大震災) 당시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불령사대역사건(不逞社大逆事件)에 연좌되었다가 귀국한 인물이다.
특히 방한상은 연맹 창립 직후 11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등지의 조선인 동지와 교유하면서 긴밀한 유대를 맺는 한편, 이른바 불령사대역사건으로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된 박렬(朴烈)과 가네코(金子文子)를 면회, 위문한 뒤 의연금을 모아 송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연맹원들은 매사에 신중을 기하여 상호간의 연락도 구두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회합은 반드시 극비리에 진행하였다.
1926년 7월 일본경찰은 연맹원인 신재모(申宰模)·방한상·우해운(禹海雲, 일명 海龍)·마명(馬鳴)·하종진(河鍾璡)·정명준(鄭命俊) 등을 구속하고 가택수색을 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물증을 잡아내지 못하자 억지로 파괴음모단이라는 것을 각색해 냈다.
1926년 4월 12일 창립회원인 서동성·신재모·방한상·서학이(徐學伊)·정명준·하종진·김소성(金召成) 등과 창립 후에 가입한 마명·우해운·안달득(安達得), 그리고 연맹원은 아니지만 파괴 계획에만 참가한 김동석(金東碩) 등이 대구에 있는 신재모의 아내 이금이(李今伊)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과 제휴하는 한편, 부호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2년 이내에 대구의 주요 관공서를 파괴하고 요인 암살을 실행하기 위한 파괴단을 조직하고, 선언·강령을 기초하여 각자 서명 날인하였으며, 구체적인 행동방법은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동경자연인사(東京自然人社) 사원으로 일시 대구에 온 구리하라(栗原一男)가 경성으로 갈 때, 신재모가 동지들을 대표하여 역까지 가서 환송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파괴단에서는 상해(上海)에 있는 민중사(民衆社)의 유림(柳林, 일명 高白性, 高三賢)에게 필요한 폭탄을 사들여 오도록 위촉하였으며, 선언·강령의 비밀을 반드시 지키기로 하였다.
한편, 동경에서 체포되어 압송된 반역아연맹(叛逆兒聯盟)의 김정근(金正根)이 흑우회(黑友會)에서 발표한 선언서 몇 장을 신재모에게 우송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신재모는 그것을 서학이·방한상·정명준 등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이들 4명은 반역아연맹에 가맹한 것이 인정되었다.
일본경찰은 2개월간이나 심문을 계속한 뒤, 차경수(車景洙)·김경호(金景灝) 등 두 사람은 구류만기로 석방하고, 나머지 신재모·방한상·김동석·정명준·마명·서동성·하종진·안달득·구리하라·김정근·가스모토(掠本運雄) 등 13명은 1926년 8월 25·27일에 검사국으로 송국(送局), 기소하였다.
이들은 1927년 2월 옥중단식투쟁을 벌이는 한편,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은 방한상·신재모·김정근·서학이 각 징역 5년, 구리하라·가스모토·서동성·마명·우해운 각 징역 3년, 정명준·안달득 각 징역 2년, 하종진·김동석 각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였다. 그 뒤 김정근은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