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평양 · 안주, 평안북도 철산, 함경남도 단천 등 각 지방에 조직된 단체이다.
1926년 이래 관서 · 관북지방에는 원산청년회 · 원산본능아연맹(元山本能兒聯盟) · 원산일반노조와 평양 · 안주 · 단천 · 철산 등 각 지방에 흑우회 등 무정부주의 단체가 조직되고 있었다.
1927년에 평양에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조직되었다. 주요 회원은 이홍근(李弘根) · 최갑룡(崔甲龍) · 이주성(李周聖) · 승도경(承道京) · 최복선(崔福善) · 한명호(韓明鎬) · 이효묵(李孝默) · 김주붕(金周鵬) · 채은국(蔡殷國) · 이시헌(李時憲) · 곽정모(郭正模) · 송선택(宋善澤) · 오치섭(吳致燮) · 황지엽(黃智燁) · 전창섭(全昌燮) · 이중화(李重華) · 김찬혁(金贊爀) · 김병순(金炳淳) · 양제로(楊濟櫓) · 이성근(李成根) 등이다.
또한 같은 해 단천흑우회(端川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조중복(趙重福) · 임중학(林仲鶴) · 김낙구(金洛九) · 강창기(姜昌磯) 등이다. 1929년에는 안주흑우회(安州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안봉연(安鳳淵) · 김한수(金翰洙) · 이순창(李順昌) · 박동위(朴東葳) · 김노태(金魯泰) · 한명룡(韓明龍) · 김용호(金龍浩) 등이다.
이 밖에도 1930년 철산흑우회(鐵山黑友會)가 조직되어 정철(鄭哲) · 홍형의(洪亨義) · 김이원(金利元) 등이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8일 관서흑우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11월 10·11일 양일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준비위원으로 이홍근 · 최갑룡 · 채은국 · 조중복 등을 선임하였다.
이때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제1차에서 4차에 걸친 거듭되는 대검거로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또 무정부주의 운동진영에서도 각 지방의 산발적인 조직이 거의 완전히 적발되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져 각지에서 대표자들이 계속 평양으로 모이자 평양경찰서는 집회금지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함경남도의 조중복과 임중락은 대회날짜에 맞추어 천리길을 걸어왔다.
충청남도의 장재욱(張在旭) · 신현상(申鉉商), 함경남도 정평의 차고동(車鼓東), 홍원의 홍성환(洪性煥), 강원도 양양의 김한(金翰), 원산의 김경진(金京鎭) 등은 평양역에 도착하자 곧 일본경찰에 잡히거나 숙소에서 붙들려 강제 추방되었다.
농군으로 변장해 봉천에서 압록강을 건너 잠입한 유화영(柳華永 : 柳林)은 평양 시내에 은신했으나 결국 같은 해 11월 11일 붙들려 봉천으로 호송되었다. 동경(東京)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 대표 유현태(柳玄台)는 평양역에서 붙잡혀 동경으로 호송되었다.
이와 같은 추방 · 구금 · 도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회는 좌절되었다. 관서흑우회의 이주성 · 승도경 · 김찬혁 등은 경찰처벌령 위반을 구실로 구류처분을 받았다. 양화직공조합(洋靴職工組合)의 이효묵은 노조원으로서 흑색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최갑룡은 무직부랑자라는 죄명으로 구류처분되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해 11월 11일 무정부주의자들은 전열을 정비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