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 신현상은 궁핍한 운동자금을 마련할 방책을 모색하던 중, 동지 최석영이 미곡상을 경영하며 거래처인 호서은행에 상당한 신용을 쌓아 놓은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2월, 신현상은 최석영과 호서은행 본지점에서 15회에 걸쳐 5만 8,000원의 거액을 꺼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로 보면 상당한 금액이었는데, 그들은 곧 그 일부를 휴대하고 함경남도 정평에 들러 동지 차고동(車鼓東)과 함께 국경을 탈출, 북경(北京)으로 잠입하였다. 이에 자금이 바닥나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다.
국내에서 세 동지가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 왔다는 연락을 받은 각지의 대표자들이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이을규(李乙奎)·김종진(金宗鎭)·정화암(鄭華岩)·백정기(白貞基)·김지강(金芝江) 등이 상해(上海)와 만주에서 북경으로 모여 앞으로의 운동에 대하여 신중한 토의를 거듭하였고,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도 이 자금을 공동으로 독립운동에 사용할 방안을 제의하여 왔다.
한편, 일제 관헌은 혈안이 되어 범인과 돈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톈진 일본영사관 경찰은 3월 초에 범인들이 이 지역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탐지하고, 중국 위수사령부(衛戍司令部)를 속여 협조를 얻은 뒤 5월 1일 비밀집회소를 급습, 일당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유기석(柳基石)과 이회영(李會榮)이 백방으로 뛰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시켰다.
두 사람은 남은 돈과 함께 조선으로 압송, 같은 해 11월 예심이 종결되고, 12월 2일공주법원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형량은 신현상이 2년, 최석영이 4년, 정만희(鄭萬熙)·석윤옥(石潤玉)·김학성(金學成)이 각 1년, 신현옥(申鉉玉)·장재익(張在益)·인옥주(印玉珠) 각 6월, 벌금 30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