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평양에서 개최하려다가 실패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의 후신으로, 같은 해 11월 평양에서 이 대회의 준비위원이었던 최갑룡(崔甲龍)·채은국(蔡殷國)·조중복(趙重福) 등 9명이 여러 가지 파란을 겪으면서 꾸준히 전열을 정비하여 결성하였다.
잠정적 부서로서 관서부(關西部)·일본부·만주부를 두고 각 부에 책임자를 두기로 하였다. 1930년 8월 조중복과 최갑룡이 임무를 띠고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에 사는 박희춘(朴熙春), 한주에 사는 전창섭(全昌涉), 안주군 연호에 사는 이혁(李革)을 순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 전창섭은 폐환(肺患)으로 서해안에서 천막을 치고 요양중이었다. 그 뒤 맹원(盟員)들은 핍박한 생활난으로 인하여 상호간의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를 못하였으나, 노동운동만은 간신히 계속하였고,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사무소는 평양 시내 관후리로 옮겨 최갑룡·조중복이 지키고 있었다.
1931년 원산청년회원과 노조원 50여명이 검거된 뒤 이때부터 전국적인 검거의 선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김대관(金大爟)이 중심이 되어 동단위로 협동단(協同團)이라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비밀로 정례회합을 하면서 선전을 강화하고 조직을 확대한 사실이 단서가 되어 조직이 탄로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