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3∼4월 고병희(高秉禧)가 조대수(趙大秀)·강기찬(康基贊)·김형수(金炯洙) 등을 찾아가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사회보다는 무정부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좋겠으니, 무정부주의를 연구하여 동지들을 널리 구해야 하겠다고 역설하였다.
같은 해 4월 9일 앞의 네 사람이 김형수의 집에 모여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과 간행물을 구독하고, 매월 1회씩 회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후 수 명의 동지를 가입시켰으며, 같은 해 5월 5일 고영희(高永禧)·임상오(任祥五)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이 계조직을 만들었다.
계원은 경찰을 제외하고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공무원과 각종 실업가, 기타 제주도 유지를 제주도환(濟州島環) 12포(浦)별로 총망라하고 있었다. 계원은 매월 300원씩 출자하여 우리계 명의로 식산은행에 예치하기로 하였다. 이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통치의 제한내에서 일망정 가능한 한 이상에 가까운 사회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었다.
1930년 7월 일제의 제주도 경찰은 계원의 명부를 압수하고 계원 65명을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사건으로 엮기가 어려워 15, 16명만 문초한 끝에 고병희·조대수·고영희·강기찬·김형수·임상오 등 6명만을 주모자라 하여 기소, 1930년 12월 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을 열었다.
우리계는 계원 성분으로 보나 친목과 복리증진이라는 취지로 보나 비밀조직일 수 없다. 계조직은 우리 민족의 전통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병희·조대수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계조직 속에서 아나키사회의 싹을 발견하여, 그 속에 무정부주의의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시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