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한인 아나키스트단체인 흑우연맹 회원들이 노동단체인 동흥노동동맹과 자유청년연맹과의 협력으로 1930년 8월 1일부터 1936년 5월 6일까지 발간한 월간신문이다.
흑색신문은 동흥노동동맹의 이문열(李汶烈)과 흑우연맹의 원심창(元心昌)·한하연(韓何然) 등에 의해 1930년 5월부터 준비하여 8월 1일자로 창간호를 발간했다. 흑우연맹은 1930년 4월 기관지 발행을 위해 동흥노동동맹 등 각 노동조합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매월 25일 편집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창간호에서 편집자는 “불합리한 사회에 대하여 파괴적 행동으로 돌진한다”라는 포부를 밝혔고, 편집은 최학주(崔學柱)·오우영(吳宇泳)·양일동(梁一東) 등 10여명이, 인쇄는 최락종(崔洛鍾)이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최학주에 이어 1934년 1월부터 이동순(李東淳)이, 그리고 36호부터 종간까지는 정찬진(丁贊鎭)이 발행과 편집을 맡아 신문을 발행했다. 신문사는 처음 도쿄 간다구(神田區) 진보조(神保町)에 사무실을 두어 1936년 5월 6일 제37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흑색신문』은 창간호부터 발매금지와 지형압수를 당한데 이어, 신문사 압수수색과 편집책임자 구속 등 일본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더욱이 재정악화로 인해 집세체납으로 벌금을 물거나 강제철거 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흑색신문』은 항일 독립사상 고취와 아나키즘 선전의 중요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신문은 매월 5일 1회, 2천부 가량 2면씩 발행되었다. 수차례 4면 증면발행을 목표로 후원금 모집에 노력했으나, 재정사정이 열악하여 2면에 머물렀다.
각 호별 주요 내용은 일본과 국내소식과 함께 중국, 또는 서구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상황을 담고 있으며, 각종 아나키즘 이론을 선전하거나 외국의 운동상황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신문은 노동절행사 참여, 만보산(萬寶山)사건 규탄연설회 개최, 관동(關東) 대학살 추모대회 등을 비롯해 진재(賑財)동포 구호운동이나 중국주재 일본공사인 아라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미수사건의 백정기(白貞基) 등 구속동지 지원과 조선인 인권옹호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일본당국의 탄압과 편집자들의 잦은 구속, 그리고 발간자금의 부족 등으로 37호(1935년 4월)를 끝으로 1936년 5월 6일 폐간되고 말았다.
『흑색신문』은 1930년대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파쇼체제 강화와 사상통제의 압력 속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달리 독자적인 항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만들어진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기관지였다. 이 신문은 일본과 국내에서 일어난 제국주의 침략상을 강력히 비판하는 한편, 국내와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는 항일 반제국주의운동을 소개하였고, 아나키즘의 이론과 운동상황을 선전하는 중요한 언론기관지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