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거류민단(在日朝鮮居留民團)이 1947년 2월 21일 박준(朴準)을 발행인으로 창간하여 9호(1947년 6월 30일자)까지 매월 발간한 기관지로, 약 10만부 정도가 발행되었다가 『민주신문』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재일한국인들 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우파세력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약칭 건청)을 결성하였다. 이어 항일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 아나키스트들이 10월 27일 뒤늦게 석방된 박열(朴烈)을 위원장으로 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창립하였다. 이에 두 단체가 합동하여 1946년 10월 3일 재일조선거류민단(在日朝鮮居留民團, 이하 민단 약칭)을 발족하였다.
민단은 귀국사업 후원과 동포들의 민생문제 지원 등에 앞장섰는데, 민단 중앙총본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1947년 2월 21일 기관지 『민단신문(民團新聞)』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교육부 차장을 맡은 박준(朴準)을 발행인으로 하여 약 10만부 발행하였다. 발간장소는 민단 중앙총본부가 있는 도쿄 우시코메구(牛込區) 와카마츠조(若松町) 21이다.
『민단신문(民團新聞)』은 창간사에서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정치운동에 편중되지 않고” 민생문제와 문화향상, 국제친선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신문은 1946년 12월 5일 일본 도쿄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박사의 「재일동포에게 고함」이란 글과 박열 단장을 회견하는 이승만 박사의 동정을 실어 그의 남한단독정부 수립노선을 지지하였다.
이어 제3호(3월 20일자)에서는 워싱턴발 UP통신을 인용하여 “남한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즉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이승만의 성명에 대해 해설보도하였다. 또 제5호(4월 20일자)에는 “미국의 경제·군사적 지원 아래 남한이 앞장서서 생활의 민주화를 성공시키자”는 내용의 논평을 실었다. 제9호(6월 30일자)에는 박열 단장이 자신의 논고인 「건국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를 배격할 것」을 주장하면서 “38도선의 철폐를 위해 남한임시정부의 강력한 출현을 기대한다”는 내용을 기술하였다.
민단신문은 1947년 2월 21일부터 9호(1947년 6월 30일자)까지 발간되어 초대 민단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했다. 특정 정치이념에 편중되지 않겠다는 민단의 선언서와 창간사와는 달리, 이승만 단독정부노선을 지지하는 논평을 내었다. 박열 단장의 이승만 지지방침으로 내부 반발로 인해 신문발행도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