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晋州) 출신의 향리이다. 1200년 진주의 공사(公私) 노예가 중심이 되어 주리(州吏)들의 강압적인 수탈과 억압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때 주리(州吏)의 집 50여 호가 약탈되고 불이 났는데, 그 불이 정방의의 집에까지 번졌다. 정방의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관아에 나타났으므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하여 고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풀어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牧師) 이순중(李淳中)이 정방의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옥에 가두고 국문하려고 하니, 동생 정창대(鄭昌大)가 나타나 정방의를 부축하여 도망갔다. 그 뒤 무리를 모아 평소 원한이 있던 자들을 죽였는데 그 수가 6,4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순중은 각문(閣門)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나 정방의가 위협하여 일을 보도록 하였고, 그들은 은병(銀甁)을 거두어 이것을 권신에게 뇌물로 바쳐 죄를 면하고자 하였다. 이때 안찰부사(按察副使) 손공례(孫公禮)가 진주에 이르러 이 사실을 안문(按問)하는데, 이민(吏民)들이 모두 정방의를 두려워하여 정방의에게 죄가 없다고 하므로, 도리어 이순중이 초도(草島)에 유배되었다. 그 뒤에도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 중낭장 이당적(李唐績) 등을 보내어 안무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처럼 정방의가 진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진주민란의 성격이 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처음 봉기를 주도했던 노예들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진주 사람들은 합주(陜州)에서 난을 일으킨 광명(光明)·계발(計勃)의 무리를 끌어들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방의의 무리는 그 기세를 타 노올부곡(奴兀部曲)까지 이르러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주변의 천민들과 힘을 합쳐 계속 정방의를 치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정방의는 1201년 3월 진주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아우 정창대의 무리 200여 명도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