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명종 즉위년)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신분질서의 해이와 집권자들의 토지점탈, 지방관의 탐학 등으로 사회가 동요하자 전국각지에서 농민·천민의 난이 잇따라 일어났다.
탐라는 이미 명종 초기에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교체를 요구한 바 있으며, 또한 1186년(명종 16)에는 탐라가 반역하였다는 소문에 정부에서 놀라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하였다가 무고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신종 때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반란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탐라주민들도 영향을 받아 1202년 10월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하려고 난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소부소감(小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그 해 12월 반란의 괴수 번석(煩石)과 번수(煩守)를 죽임으로써 평정되었다. 이 난 또한 지방관의 탐학과 공물의 과대징수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하여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