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령사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석령사가 일으킨 반란.
정의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석령사가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고려사회는 무신정권 성립 후 신분질서의 해이와 중앙집권력의 약화, 지방관의 침탈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남부지방에서는 석령사의 난이 그 시초이다.

경과

이 난에 관한 자세한 내용과 석령사가 어떤 인물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175년(명종 5) 8월 산업급제자(算業及第者) 팽지서(彭之緖)는 승선(承宣) 송지인(宋智仁), 진사 진공서(秦公緖) 등이 은밀히 남적(南賊) 석령사와 함께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고 참소하였다. 석령사(石令史)에서 영사(令史)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방관청에 소속된 품관 이하의 관직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자 왕은 내시 이존장(李存章), 낭장 차약송(車若松)한테 이들을 국문하게 했는데, 체포·구금된 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다시 내시 윤민첨(尹民瞻)과 상장군 최세보(崔世輔)한테 취조하게 해 진위(眞僞)를 막론하고 연루자는 모두 섬으로 귀양보냈다.

또한, 성문을 닫고 음모자를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 문신들이 남적(石令史 일당을 지칭)과 더불어 은밀히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방(重房)에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과

이로 인해 도교승(都校丞) 김윤승(金允升) 등 7명이 섬으로 귀양가고 병부상서 이윤수(李允修)는 거제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과연 문신들이 남적과 통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무신들이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것을 보면 북쪽의 조위총(趙位寵)과 함께 남쪽의 석령사가 사회적으로 큰 불안의 대상이었음은 명확한 것 같다.

의의와 평가

다만, 남적 석령사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176년(명종 6)충청도 공주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은 석령사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高麗 武人政權初期 民亂의 性格」(김당택, 『國史館論叢』 20, 1990.)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이정신, 『韓國史硏究』 61·62,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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