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 질서가 느슨해지고 하극상의 풍조 등이 사회적 동요를 가져와, 지방관의 탐학과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 · 노비 등 하층민에 의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190년(명종 20) 이후 동경(東京, 경주(慶州))을 중심으로 한 저항도 그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 저항 중에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을 표방한 경우가 있어 주목된다.
무신정변 이후 동경(경주)을 중심으로 한 저항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우선 1190년 1월 동경도적(東京盜賊)은 안찰부사 주유저(周惟氐)가 저항 세력을 진압하려다가 실패하였고, 중앙 정부에서 남로착적사(南路捉賊使)를 보낼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였다. 1199년(신종 2) 2월의 동경도적 또한 이 저항 세력의 연장으로 보인다.
1200년(신종 3) 8월 경주 이의민(李義旼) 족인(族人)과 주리(州吏)가 충돌하였다.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지후(祗候) 한광연(韓光衍)을 경주에 보내 이의민의 삼족(三族)을 도륙하고, 여러 주(州)에 사자를 보내 그 노예와 추종자들을 죽였다. 경주는 이의민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데, 최충헌은 잔존 이의민 세력의 기반을 분쇄함으로써 반발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제거됨으로써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된 사람들과 이후 새롭게 등장한 재지 세력 간의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1202년(신종 5) 10월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이 영주(永州)를 공격하면서부터 이 지역의 저항 세력들에 의한 본격적인 저항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별초군은 무신집권기 지방 주현군(州縣軍)을 대신하여 새롭게 편성한 지방군 조직의 하나였다. 이때의 경주별초군은 일반 군사를 지칭하기보다는 경주의 저항 세력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이 영주를 공격하였던 것은 지역적인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1193년(명종 23) 이후부터 저항 세력으로 잔존하고 있었던 운문(雲門)과 부인사(符仁寺) · 동화사(桐華寺) 등의 사원 세력과 합세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경주와 경상도 일대의 저항 세력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이외에 그 배경이 중앙에 대한 위기감이 드러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1202년(신종 5) 11월 경주인(慶州人)들이 저항을 일으켜 낭장동정(郎將同正) 배원우(裴元祐)를 보내, 전장군(前將軍) 석성주(石成柱)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석성주에 대해서는 그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그는 이의민의 제거 직후 이전 시기의 집권 무신 세력들이 제거될 때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직책이 단지 장군(將軍)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추대하려고 하였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낭장동정 배원우는 이 지역 주현군의 장교로 이해되는데, 경주 지역의 지방군이 저항 세력의 주동층으로 가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나머지 저항 세력의 대부분은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저항 세력 구성의 다양성, 그리고 지역적으로 경상도 전역의 저항 세력과 연합 전선을 이루었다는 점은 그 조직화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1202년 12월 경주적(慶州賊) 패좌(孛佐)가 경주에서 저항을 일으켰는데, 그는 이비(利備)와 더불어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삼아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최충헌은 대장군(大將軍) 직문하(直門下)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대장군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로, 섭대장군(攝大將軍)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삼아 저항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저항군은 운문 · 울진 · 초전(草田: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의 무리를 모아 3군(軍)을 편성하여 스스로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고, 관군을 위협하면서 해를 넘겨 가며 대항하였다. 그러나 김척후 대신에 새로 임명된 중도사 정언진(丁彦眞)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기양현(基陽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패한 뒤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성황사(城隍祠)에서 기도 중이던 이비가 정언진의 꾀에 속아 체포되었고, 운문산으로 피신해 기회를 노리던 패좌 또한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 · 강숙청(康淑淸) 등에게 잡혀 죽었다.
그러나 동경의 저항 세력은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고, 이에 동경 정벌군을 철수시키지 못하다가 1204년(신종 7)에서야 2차에 걸쳐 철수하였다. 또한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朴仁碩)을 안찰사(按察使)로 삼고, 경군 200명을 동경에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1204년 5월 김순(金順) 등이 사로잡힘으로써 경주의 저항은 일단락되었다. 이에 최충헌 정권은 행정 개편을 단행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를 강등시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하고, 관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안동의 속현이었던 기양현(基陽縣)을 보주(甫州)로 각각 승격하고,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개칭하였다.
1233년(고종 20) 동경적(東京賊) 최산(崔山) · 이유(李儒) 등이 또 다시 저항을 일으켰으나, 상장군(上將軍) 이자성(李子晟)에 의해 평정되었다.
동경(경주)를 중심으로 한 저항은 무신집권기 지방 사회의 일반적인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이 가운데 신라부흥운동은 최충헌 정권의 강경 진압에 따른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확대되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명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최씨 정권의 향후 지방 정책에 중요한 틀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경주 지역에 대한 강경 진압 이후 이전의 무신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지배 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방 사회의 저항은 희종 대 이후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