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봉(牛峰)이며, 병부상서를 지낸 이공정(李公正, 李公靖)의 아들이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제1차 침략이 시작되자 당시 상장군으로서 고려의 방어군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동선역(洞仙驛: 황해도 황주 부근)에서 적 선봉대의 기습을 받아 이를 격퇴하였으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1232년 고려 조정이 강화로 천도한 직후 어사대(御史臺)의 조례(皁隷) 이통(李通)이 경기(京畿)의 초적(草賊) 및 개경 성중의 노예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후군진주(後軍陣主)로서 조염경(趙廉卿)·최근(崔瑾) 등과 함께 3군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또한, 같은 해 충주에서 노군(奴軍)의 난이 재발하자, 역시 3군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반란의 괴수인 승려 우본(牛本)을 죽이고 난을 진정시켰다. 1233년에는 중군병마사가 되어 적괴(賊魁) 거복(居卜)·왕심(往心)을 죽여 용문창(龍門倉)의 난을 평정하였다.
다시 6월에는 동경(東京: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산(崔山)·이유(李儒) 등을 영천에서 주멸(誅滅)하고 개선하는 등 대몽항쟁기에 있어서 초기의 민란을 진압하는 데 자주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나,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두려워 하여 병을 핑계로 출입을 끊었다.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용력(勇力)이 있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시호는 의열(義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