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도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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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당나라는 태종 · 고종 연간에 국력이 융성해져 그 영역이 사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변경지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 · 선우(單于) · 안서(安西) · 안남(安南) · 북정(北庭) 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목차
정의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당나라는 태종 · 고종 연간에 국력이 융성해져 그 영역이 사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변경지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 · 선우(單于) · 안서(安西) · 안남(安南) · 북정(北庭) 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내용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는 2만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도독부(都督部)·42주(州)·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이 때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 유력자 중에서 도독·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고구려인의 자치에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 자체가 어디까지나 계획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무렵,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당에 대항하였다.

한편, 신라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당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670년에는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 : 만주 撫順 서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한 당은 676년 2월에 한반도를 포기한 채 도호부의 출정본부를 요동성(遼東城 : 만주 遼陽)으로 옮겼다. 이 때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그 뒤, 697년에 당의 요동지배의 일대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함에 따라 그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로 하여금 만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방침을 채택해 일단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도호부는 부치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는 요서군 옛성으로 옮겼다.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으며,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당회요(唐會要)』
『자치통감(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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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都護府考」(津田左右吉,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東京大學文科大學, 1915)
「高句麗滅亡後の流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の關係」(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1930 ;『滿鮮史硏究』 上世 2, 吉川弘文館, 1960)
『唐代安東都護府考略』(王懷中, 禹貢 6-3·4, 1936)
『안동도호부고』(김육불, 제언, 1948) 저자명
『동북통사』(김육불, 낙천출판사, 1971)
「唐代前期的邊防」(康樂, 『國立臺灣大學文史叢刊』 5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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