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박육화(朴育和)이고 어머니는 이진(李稹)의 딸이다.
당시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던 유승단(兪升旦)이 극찬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1196년(명종 26) 천거로 장례령동정(掌醴令同正)이 되었다.
신종(神宗) 초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일대에서 민란이 계속되자 1202년(신종 5) 최충헌(崔忠獻)이 문무관 3품 이상을 사제(私第)에 모아 대책을 의논할 때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반란민들을 선유하였다.
그러나 반란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병마사로 삼아 토벌하니 그들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1204년 3월 초토사(招討使) 정언진(丁彦眞) 등이 돌아오자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은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남은 무리들을 진압하고, 그 해 5월 김순(金順) 등 20여 명을 사로잡아 민란진압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