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
지눌은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였을 때 승려 10여 명과 함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선정과 지혜를 닦자고 결의하였고, 실제로 1188년(명종 18)에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1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190년(명종 20)에 결사 결성의 배경과 결사의 기본적 입장인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내용을 설명하며 여러 수행자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하여 이 글을 지어 널리 퍼뜨렸다. 1200년(신종 3)에 결사의 규모가 커져 결사의 근거지를 전라도 순천의 조계산으로 옮긴 후 이 글을 목판에 새겨 널리 퍼뜨렸다. 이때 결사의 이름을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지만, 글의 제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그대로 '권수정혜결사문'이라고 하였다.
초간본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간행된 판본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은 1608년(광해군 41)에 학명(學明)이 써서 송광사에서 간행한 것과 1635년(인조 13)의 운주산 용장사본(龍藏寺本), 1681년(숙종 7)의 울산 운흥사본(雲興寺本), 1860년(철종 11)의 천마산 봉인사본(奉印寺本)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본도 10여 종이 있으며, 지눌의 글을 모은 『보조국사법어』와 『보조전서』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권두에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 있고, 다음에 일곱 가지 문답을 통해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 및 수행하는 이들이 가지기 쉬운 의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마지막에 수행자들에게 결사의 참여를 권하고 있다.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먼저 “한 마음 미혹하여 가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요, 한 마음 깨달아 가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가 부처”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마음을 비워서 가만히 합하고 밖에서 도를 구하지 않아야 하며,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서 개경 보제사 담선법회 때에 동료들과 함께 수행인들이 마음을 밝히는 일보다는 자기 이익만을 탐하고 헛되이 의식을 허비하는 현실을 개탄하고서 함께 결사를 결성하여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자고 권유한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일곱 가지 문답은 지눌의 주장에 대해 당시 승려들이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지눌이 생각하는 정혜쌍수의 내용과 결사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첫 번째 문답은 “바른 도가 가려진 말법(末法)의 시대에는 선정과 지혜를 닦기보다는 염불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시대가 변하였더라도 심성은 변하지 않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염불이나 경 읽기 등이 모두 필요한 수행이지만 선정과 지혜가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며, 행하기 어렵다 하여 금생에 닦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닦기 어려워짐을 밝히고 있다. 또한 말세라는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령된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정법과 말법 시대를 논하기보다는 제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걱정할 것과 분수를 따라 수행하여 바른 법과 인연을 맺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문답은 “선을 닦는 사람이 신통(神通)을 나타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신통이란 불심을 바로 믿는 법의 힘을 따라서 더욱 수행하여 공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얼어붙은 못이 모두 물인 줄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녹아야 논밭에 물을 대거나 물건을 씻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지혜와 선정에 의지하여 마음의 온갖 망상을 제거하면 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지엽적인 문제에 애착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세 번째 문답은 “참된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음에 맡겨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옛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무엇 때문에 다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심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는 본래 빈 것’임을 믿어 알고 밖으로는 계율을 지니면서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을 닦으면서 애써 누르지 않게 될 수만 있다면 마음에 맡겨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현재 도를 닦는 사람들이 깊은 신심이 없어서 수행하지 않고 방치하면 더욱 타락하게 되므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을 거두어 잡아 안으로 비추어 보되 먼저 고요함[寂寂]으로써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또랑또랑함[惺惺]으로써 혼침한 정신을 다스려 혼침과 산란을 고루 제어할 것을 당부하였다.
네 번째 문답은 “제 마음을 비추어 보아 불도를 이루게 한다는 것은 상등의 근기(根機)가 아니면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부처는 중생들이 제 마음의 신령함과 자재함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는 것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 가르침을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제 마음을 속여 믿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다면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 문답은 “교종에서 52위(位)의 수행법을 세워 오랜 세월 동안 닦아 가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선종에서 또랑또랑하고 고요함의 두 가지 법에 의해 혼침과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림으로써 부처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교종에서 온갖 행을 다 닦지만 그것 또한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작(無作)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므로, 선종에서 고요함과 또랑또랑함으로써 수행하여 본성에 곧바로 계합하도록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신론(起信論)』 · 『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 ·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 · 『화엄론(華嚴論)』 등을 인용하여, 수행이란 결국 고요함과 또랑또랑함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여섯 번째 문답은 “학문을 널리 배우고 가르침을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데 힘쓰면 마음 수행에 방해가 되고, 그렇다고 중생 제도를 위한 이타행을 하지 않으면 고요함만을 추구하는 무리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학문을 배우되 이해에 집착하지 않고 중생 구제에 힘쓰되 자기와 남의 구분이 없으면 그 자체가 올바른 수행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 제도를 위한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해 정과 혜를 닦는 것이므로 세상에서 떠나 고요함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일곱 번째 문답은 정토왕생을 위한 수행과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의 차이점에 대한 것으로, 왕생을 위한 수행은 결국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므로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마음뿐’임을 밝게 알아서 지혜와 선정을 닦으면 저절로 정토에서 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였다. 염불 또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다. 끝으로 지눌은 정혜결사를 하게 된 경위 등을 밝히고 있다.
문답에 이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동료들이 나중에 정혜를 함께 닦는 결사를 맺자고 이야기하였지만 오랫동안 실천하지 못하다가 1188년에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던 득재(得材)의 제안으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여러 수행자들이 참여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 글은 정혜결사와 이를 계승한 수선결사의 기본적 입장을 반영하는 글로서 결사뿐 아니라 불교계 전체에 널리 유포되었고, 이후 선종 승려들의 수행의 기본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이 글은 또한 정혜결사 및 수선사의 결성 배경과 사상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글이자, 지눌의 초기 선 사상을 잘 보여 주는 글로써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