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편찬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세가’라는 용어는 그 전에도 사용되었으나, 그 때는 국가 공직이나 봉록의 세습권을 가진 가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황제의 본기(本紀)에 대한 제후의 열국사(列國史)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하늘의 별자리인 28수(宿)가 북극성 주위를 운행하고, 수레의 30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을 향해 모이듯이 하늘의 운행은 영구히 멈추지 않으며, 군주를 보필하는 수족으로서의 신하는 성좌(星座)나 바퀴살과 같다. 정의로써 도리를 행하고 그것으로 주상을 받든 자를 위해 세가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편찬 형식은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라 서술하였으며, 열전 기술 방식도 함께 사용하였다.
세가는 나라를 세우고 가문을 계승함에 있어 여러 세대가 서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마천 이후의 기전체 사서 가운데 양(梁) 무제의 칙명에 따라 만들어진 『통사(通史)』가 삼국을 서술하면서 촉(蜀)과 오(吳)를 세가로 한 것과, 구양수(歐陽修)가 편찬한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십국(十國)을 세가로 한 이외에는 모두 열전에 합하여 편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구삼국사(舊三國史)』가 기전체 정사로 편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세가 형식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최초의 기전체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세가가 별도 항목으로 작성되지는 않았다
현재 세가 형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이제현(李齊賢)이 편찬한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가 있다. 그러나 이는 태조로부터 충선왕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다룬 통사성의 세가로서, 기전체 정사의 한 편목으로 편찬된 것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기전사 정사의 세가 형식을 갖춘 것으로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제후의 위치를 자처하여 고려 군주의 기사를 본기 대신 세가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교적 명분론이 엄격히 적용된 결과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