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삼국사(舊三國史)』는 현전하지 않는 역사서로, 저자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원래의 명칭이 ‘삼국사(三國史)’였다고 생각된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구삼국사(舊三國史)’로 되어 있는데, 이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나온 후에 ‘구(舊)’자를 덧붙인 듯하다. 또,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서는 이 책을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라고 하였는데, 해동은 중국의 ‘삼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삼국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의천(義天)이 덧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체재는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에서 보이듯 기전체(紀傳體)의 형식으로 서술된 듯하며, 각 왕의 기록을 ‘본기(本紀)’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체재를 본떠 편찬한 것인 듯하다. 편찬 시기가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까닭은 『삼국사』라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구삼국사』의 편찬은 광종(光宗) 때 당(唐)나라의 제도를 본떠 사관 제도(史館制度)가 설치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구삼국사』의 편찬 시기를 1013년(현종 4)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삼국사기』의 「잡지(雜志)」에 기록된 태봉(泰封)의 관제가 현종(顯宗) 때까지 유지되며, 거란(契丹)과 전쟁을 한 직후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1013년에 『구삼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주요 자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주몽(朱蒙) 조에 실린 신화의 내용이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에 실린 내용을 약간 줄인 것이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동명왕본기」에서는 신화와 설화적인 내용을 옛 기록에 적힌 그대로 전재(轉載)하는 방식을 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아직 유교적(儒敎的)인 사관(史觀)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구삼국사』에서는 고구려를 내세우는 역사 서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 초기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 고구려에 관한 기사가 신라 관련 기사보다 많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책에서 고구려만을 계승한 왕조를 강조하였다기보다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진정한 통일 국가라는 의식이 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삼국사기』와 『국사(國史)』라는 서명이 인용된 것이 있어 『국사』에서 인용한 내용이 『삼국사』로부터 인용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으나, 김부식이 쓴 사론(史論)을 인용하면서 『국사』로 쓴 것도 있어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형식이 다르지만 『구삼국사』가 인용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국사』와 『구삼국사』 등 인용의 전거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