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는 주로 천하를 좌우하던 제왕들의 사적을 대상으로 정치적인 흥망 성쇠의 자취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적어 넣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만들면서 선진(先秦) 시기에 사용되었던 『우본기(禹本紀)』의 이름에서 따서 12기(紀)를 작성, 책의 첫머리에 두었다. 이후 기전체 정사의 한 편목으로 자리잡았는데, 요점을 간략 명료하게 제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본계와 관련되었으므로 본(本)이라고 하였으며, 여러 가지 일을 통할하여 해결한 것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으므로 기(紀)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본기라는 용어는 역대 왕조의 지배자의 역사를 다룬다는 의미와 모든 저작의 근본을 이룬다는 의미, 연대기적인 형식을 취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후 기전체 역사책들은 모두 본기를 맨 앞에 배열하였다. ‘기(紀)’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기’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기전체 정사의 한 부분으로 작성하였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고려 중엽 이규보(李奎報)가 편찬한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인용된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들 수 있다.
이는 고려 초기에 편찬된 『구삼국사』에 수록되었던 것으로서, 이로 미루어 『구삼국사』는 기전체 정사의 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가운데 동명왕에 대한 기록이 남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 외 기전체 정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존하는 최초의 것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는데, 고구려·신라·백제 3국의 기록이 본기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기에 들어와서는 유교적 명분관이 엄격히 적용되어, 기전체 역사서를 적으면서도 본기 항목을 설정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사』에서도 고려 역대 왕들의 사적을 세가(世家)에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