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중국에 대한 사대문서(事大文書)로 국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표문, 황태후·황후 또는 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을 전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 사신이 중국 예부(禮部)에 바치는 자문(咨文)은 표문과 전문으로 문장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표전문제라 하면 조선 건국 초기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의 글귀가 예의에 어긋났다고 명에서 트집을 잡아 이로써 발생한 양국간 일련의 불화사건을 말한다. 그 첫번째는 1395년(태조 4) 11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청하러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정총(鄭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정총이 가지고 간 표문의 언사(言辭)가 불손하다고 명제(明帝)에게 트집을 잡혀 정총은 현지에 억류되었다. 이어서 이듬해 정월 하정사(賀正使)로 정당문학 판문하부사(政堂文學判門下府事) 유구(柳玽)와 한성부윤 정신의(鄭臣義)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도 예부에 올린 표전문이 경박희모(輕薄戱侮)하다 하여 두 사신을 억류시킨 뒤, 글의 찬자(撰者)를 보내라고 하였다.
표문은 대사성 정탁(鄭擢)이 찬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교정했으며, 전문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약항(金若恒)이 찬하였다. 이 때 정탁은 칭병(稱病), 정도전은 체면상 가지 않고 김약항 혼자 갔다가 억류되고, 재차 정탁과 정도전을 불렀으나 이에 불응하자 명사(明使)를 보내와 이를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계품사(啓稟使)로 한성부윤 하륜(河崙)이 정탁과, 정도전 대신 표문의 제찬에 참여했다 하여 자원한 권근(權近)을 대동하고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보고하고 해명하는데 성공하였다.
표문의 내용에 대한 시비는 1397년에도 있었는데, 표전문을 트집잡아 개국의 중신 정도전을 압송하려 했던 것은 1374년(공민왕 23) 김의(金義)가 명사 채빈(蔡斌)을 죽이고 원나라에 붙은데 크게 노했던 명나라 태조의 보복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명나라 태도에 격분, 정도전과 남은(南誾)을 중심으로 태조의 호응을 받아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력을 증강해 진도강습(陣圖講習)을 강화하는 등 일련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398년 5월 조선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 태조가 죽었다. 그리고 9월에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도 죽었으며, 이듬해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함으로써 표전문 문제와 요동정벌계획 등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표전문의 문사(文詞)에 대한 시비는 그 뒤에도 때때로 대두되었다. 1545년(인종 1)윤계(尹溪)가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가서 올린 사은표의 ‘旣飽爾德之顯顯(기포이덕지현현)’ 문구에서 ‘爾’자가 불경함을 들어 ‘令’자로 고치라는 명령에 따라 수정하였다.
1573년(선조 6)에는 명나라 문황제의 묘호(廟號)가 태종이고 뒤에 성조(成祖)라 시호(諡號)했는데, 조선에서 올린 문서에 ‘태종문황제’라고 써 문제가 되었다. 또, 1679년(숙종 5)에 동지사(冬至使)의 표문에 회피(回避)해야 할 글자를 썼다 하여 그 벌로써 은 5, 000냥을 내어놓으라고 했다가 면해 주었다. 또, 1696년(숙종 22)에는 사은하는 전문 가운데 ‘간고(幹蠱)’라는 글자가 있어 불경함을 들어 그 벌로 은 1만냥을 내어야 한다고 했다가 면해 주었다.
1698년에도 사은의 표전 가운데 ‘술지(述旨)’의 ‘지’자가 줄을 떼어 올려 쓰지 않은 것이 양식에 맞지 않다고 문책하였다. 그 뒤 1705년에는 중국 예부에서 경하하는 표전문은 정해진 양식이 있는데, 조선에서 보내는 문서에는 매번 변경하고 있다 하여 그 양식을 한 통 등사해 보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