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원(聖源), 호는 오룡재(五龍齋)이다. 영남(嶺南)에 살던 선조(先祖)가 함경도 6진으로 유배된 것을 계기로 대대로 종성(鍾城)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남운기(南雲起), 아버지 남이혁(南爾赫),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1731년(영조 7)에 함경도 종성 부계(涪溪)에서 태어났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두여(韓汝斗)의 딸이다.
두 형과 함께 한몽린(韓夢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9년(영조 35년) 29세의 나이로 식년 생원시 2등으로 입격하였다. 1768년(영조 44년) 집경당(集慶堂)에서 열린 경연에 참석하여 영조의 특은(特恩)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옹원직장과 내자시주부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문의현감(文義縣監)과 평택현감(平澤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1795년(정조 19) 공조좌랑을 지내고, 1797년에는 종4품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에 올랐다.
효성이 지극하여 4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고기 및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소식(素食)만 하였다고 전한다. 1798년 68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817년(순조 17) 후학 양성에 크게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종성서원(鍾城書院) 내 희성사(希聖祠)에 한몽린 · 한세양(韓世襄) · 한여두(韓汝斗)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