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규(禹禎圭)의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여보(汝寶), 호는 남파(南坡)이다. 이황의 문인이었던 우희길(禹熙吉)의 현손(玄孫)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우성린(禹聖隣), 할아버지는 우형하(禹亨夏)이다. 아버지는 우서주(禹叙疇)이며, 어머니 풍천노씨(豐川盧氏)는 노세첨(盧世瞻)의 딸이다.
1718년(숙종 44)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1747년(영조 23) 30세의 나이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65년에는 성균관에서 장의(掌議)가 되었다. 그해 영조가 작헌례(酌獻禮)를 할 때 시행한 책문(策問)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얻었다. 이에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면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안도사(平安都事) · 전적(典籍) ·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직강(直講) 등을 거쳐 1775년(영조 51) 만경현감(萬頃縣監)을 역임하였다. 1781년(정조 5) 다시 예조좌랑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나아갔다. 1786년 장령(掌令)을 거쳐 1787년 우통례(右通禮)에 오른 우정규는 그해 6월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선안을 40여 조항으로 정리하여 『 경제야언(經濟野言)』이란 책으로 엮어 상소와 함께 왕에게 올렸다.
여기서 우정규는 지방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생을 근본에 둔 군제 · 요역제(徭役制) 및 각종 세제(稅制)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이외에 부인수식(婦人首飾) · 과거제 · 교육제 · 국방 · 재정 · 조선(漕船) · 수령 임명 등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제도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정조는 비변사 등에 명하여 『경제야언』에서 지적한 문제를 검토하게 하였고, 그 방안을 환곡 등의 폐단 시정에 채용하였다.
1789년에는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고, 1791년(정조 15)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