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장문(長文), 호는 존재(存齋) · 비수재(賁需齋) 등이다. 세종대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강석규(姜錫圭), 조부는 강제부(姜濟溥)이다. 아버지 강주천(姜柱天),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유기(韓有箕)의 딸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윤(李潤)의 딸과 혼인하였다. 한원진(韓元震) ·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강규환은 1715년(숙종 41) 19세의 나이로 둘째 외삼촌 한원진에게 『중용』, 『대학』, 『태극도설』 등을 배웠다. 1716년에는 이재(李縡)와 1720년에는 권상하(權尙夏)에게 나아가 이기설(理氣說)을 배우며 학문을 깊이 익혔다.
1723년(경종 3)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24년에는 「의상시무봉사(擬上時務封事)」를 올렸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안무사(嶺南按撫使) 겸 안동부사로 임명된 박사수(朴師洙)의 추천을 받아 종사관(從事官)으로 차출되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이때 병학(兵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진법(陣法) 훈련 및 진격과 방어 계책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였다. 1729년(영조 5)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731년(영조 7)에 종사관 시절 얻은 병이 악화되어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강규환은 스승 한원진과 『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호론계의 학문을 체득하였다. 강규환은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를 기반으로 이황(李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이단을 비판하는 등 학맥의 정통성 확보에 주력하였다. 또 보수적 경세론의 입장에서 불필요한 지출 및 관직을 줄여 남은 경비를 군포(軍布)에 충당하는 방법으로 양역(良役)의 폐단을 해결할 것 등의 소극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시문집으로 12권 6책의 『비수재집(賁需齋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