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수(朴師洙)의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내헌(耐軒) · 내재(耐齋), 자는 경로(景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세기(朴世基), 할아버지는 박태정(朴泰定), 할머니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딸 경녕군주(慶寧郡主)이다. 아버지는 박필영(朴弼英), 어머니 죽산안씨는 안진(安縝)의 딸이다. 양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백부 박필명(朴弼明), 양어머니 한산이씨는 이흥직(李興稷)의 딸이다. 첫째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송정명(宋正明)의 딸이고, 둘째 부인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태형(張泰亨)의 딸이다. 노론이면서 낙론학파인 박필주(朴弼周)의 족질(族姪)이다. 또 영조 정권 초기에 탕평책(蕩平策)을 주도한 송인명(宋寅明)이 처의 재당숙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생원으로 입격하여 참봉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1725년(영조 1)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고을을 잘 다스린 공으로 상을 받았다. 1728년 대사성, 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 대사간, 대사헌, 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 병조참판,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 1729년에 이인좌의 난에 대한 기록물인 『감란록(勘亂錄)』을 찬집한 공로로 송인명과 함께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하사받았다.
1732년 대사헌, 형조참판, 황해도관찰사, 1734년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1737년 호조판서, 1738년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1739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지내던 중 5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