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정언, 교리, 헌납, 형조참의, 안동부사 등을 지낸 문신.
이칭
백우(伯愚)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6년(영조 2)
사망 연도
1779년(정조 3)
본관
청풍(淸風)
주요 관직
수원부사|병조참의|안동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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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상묵은 영조~정조대에 정언, 교리, 형조참의, 안동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사림의 영수인 김식과 효종 대의 명신인 김육의 후손이며, 정조의 비 효의왕후의 재종숙이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국에서 정치적으로는 노론, 학문적으로는 낙론으로 활동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정언, 교리, 헌납, 형조참의, 안동부사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우(伯愚)이다. 9대조가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기묘명현으로 손꼽히는 김식(金湜)이며, 5대조가 김육(金堉)이다. 고조할아버지가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인 김우명(金佑明)이고, 증조할아버지가 명성왕후의 아우인 김석연(金錫衍)이다. 할아버지는 김도흡(金道洽)이고, 아버지는 현감 김성채(金聖采)이다. 어머니 파평윤씨는 윤식(尹寔)의 딸이자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의 손녀이다. 부인 여흥민씨는 민우수(閔遇洙)의 딸이다.

주요 활동

1747년(영조 23)에 진사(進士)가 되고, 1754년에 세자 세마(洗馬)가 되었다. 이후 공조좌랑, 용궁현감(龍宮縣監) 등을 거쳐 1762년에 호서어사(湖西御史), 1764년에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765년에 구일제(九日製)에서 2등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상을 받아서 이듬해인 1766년에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이 41세였다.

1766년에 정언(正言), 교리(校理), 1767년에 겸문학(兼文學), 응교(應敎), 검상(檢詳), 1768년에 응교, 헌납(獻納), 1769년에 보덕(輔德), 1770년에 교리, 수찬, 문학, 부교리가 되었다. 이처럼 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사간원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면서 언관의 활동에 주력하였고, 그 결과 번번히 삭직(削職)되거나 향리로 쫓겨나기도 하였다.

1771년에 수원부사로 나가서 환곡 관련 사무를 잘 처리한 일로 숙마(熟馬) 1필(匹)을 하사받았다. 1774년에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 안동부사로 부임해서는 정조로부터 민정을 잘 살폈다는 칭찬을 받았다.

천성이 호방하고 문학과 술과 산수를 즐겼다고 한다. 1767년에 이유수(李惟秀)의 동원(東園)에서 열린 시회(詩會)인 동원아집(東園雅集)의 일원이 되어서 동원십삼학사(東園十三學士)로 활동하였다. 벗 김종수(金鍾秀)가 지은 묘갈명인 「김백우묘갈명(金伯愚墓碣銘)」이 『몽오집(夢梧集)』에 실려있다.

참고문헌

원전

『몽오집(夢梧集)』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정조실록』

논문

정만조, 「효의왕후 생애를 통해 본 정조 비빈들의 삶」(『정조대왕자료집』 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박기성, 「심원 이유수와 동원아집-유언호와 남공철의 기문을 중심으로-」(『한문학논집』 51, 근역한문학회, 2018)
강혜선, 「이인상 그룹의 교유양상과 시서화 활동 연구」(『한국한시연구』 24, 한국한시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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