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평(子平), 호는 오담(梧潭)이다. 경상도 단성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단계리에서 태어났다. 5대조는 대사간을 지낸 권도(權濤)이다. 아버지는 권수무(權壽武)인데, 권시형(權是亨)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며, 부인은 신윤(申玧)의 딸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경상도 단성현에서 ‘삼권(三權)’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친 권도의 후손이다. 7세에 학문으로 이름이 높은 본생(本生) 백부 권수붕(權壽鵬)에게 『소학』을 배웠다. 14세에 시(詩)와 부(賦)를 공부하고, 19세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준비를 하였다. 23세인 1743년(영조 19)에 생원시(生員試) 초시에 입격하였으나 최종 단계인 회시(會試)에서 낙방하였다. 이듬해에 아버지 상(喪)을 치렀고, 27세에 다시 생원시에 도전했으나 회시에서 낙방하였다.
이후 진로를 무(武)로 바꿔서 30세인 1750년(영조 26)에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명문 집안의 자제 중 선전관(宣傳官) 후보자를 미리 천거해 놓는 선천(宣薦)에 들었다. 같은 해에 서반 청요직(淸要職)인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訓鍊院)의 주부(主簿)와 첨정(僉正),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1760년(영조 36) 장기현감, 1772년 해남현감, 1775년 광양현감, 1776년(정조 즉위년) 충주영장(營將), 1780년(정조 4) 경기도우방어사 등을 지냈다. 1781년에 평안도방어사를 거쳐 1783년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올랐으며, 1784년에 좌수영(左水營)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무관으로서 학문에 힘쓰고 도학과 예학을 탐구하여 '유장(儒將)'으로 불리었다. 30대 초반에 송명흠(宋明欽)을 사사했으며, 50대 초반에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두 사람의 문인록에 올랐다. 송명흠(宋明欽) · 김원행(金元行)은 노론의 대학자인 이재(李縡)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51세인 1771년에 경상도 삼가(三嘉)에 오담정사(梧潭精舍)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제자도 모여들어 송석유(宋錫楡) · 신돈항(愼敦恒) · 권득중(權得中) 등이 와서 배웠다. 하지만 1779년에 아들이 죽자 이듬해에 단계(丹溪)로 돌아왔다. 문집으로는 1915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오담선생문집(梧潭先生文集)』(2권 2책)이 있다.